정치이론가들이 대의민주주의를 정당화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국가의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직접민주주의는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처럼 규모가 매우 작을 때에나 가능한 정치제도이다. 둘째, 직접민주주의의 폐해 때문이다. 개인들은 정치적 선동과 동원에 취약하며, 국민의 여론은 쉽게 변화하고 오도되기 쉽다. 오히려 대의민주주의가 안전하고 장기적 국가발전에 더 유리하다는 주장이다.
▼정파의 주장 ‘국민’빌려 정당화 ▼
그런데 최근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민주주의의 환경이 크게 바뀌고 있다. 정보의 획득과 참여의 비용이 크게 줄어듦으로써 대의민주주의를 정당화시켰던 규모의 문제가 해소되고 있다.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증대하고, 정치적 기업가들은 이러한 변화를 활용해 권력을 획득하려 한다. 그 때문에 두 가지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국민 대표자의 대표성이 의심받는 한편, 국민에 대한 직접적 호소와 정치적 동원이 용이해졌다. 그 결과 대의민주주의의 긍정적인 면은 부정되고, 직접민주주의의 폐해는 현실화하고 있다.
최근 우리 정치권에서는 정파적 주장을 국민의 이름을 빌려 정당화시키는 경향이 뚜렷하다. 정치지도자들이 말하는 국민이란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부 국민의 주장을 마치 전체 국민의 뜻인 양 과장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정보원장의 임명을 둘러싼 대통령과 국회의 대립은 한국정치의 이러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국회 정보위원회가 여야 만장일치로 반대했던 국정원장 및 국정원 기조실장에 대한 임명을 노무현 대통령이 강행했다. 그러자 국회의 다수당인 한나라당은 대통령이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를 무시한 처사라고 비난했고, 대통령은 국회의 월권행위라며 응수했다.노 대통령은 또 1일 밤 TV 토론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의 결정을 “개혁과 국회 중 개혁을 선택한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앞으로) 야당과 진지하게 대화하고 설득하겠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 국민의 판단으로 문제를 풀어갈 것”이라고 천명했다.
대의민주주의의 형식이나 절차보다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은 언뜻 그럴 듯해 보이나 사실 매우 위험한 것이다. 우리는 그 위험을 한국 정치사와 세계 민주주의 역사를 통해 수없이 목격해 왔다. 야당과 언론의 비판을 싫어하는 정권들은 예외 없이 국민의 이름을 들먹였다. 민주주의는 권력의 획득과 행사 방법에 관한 절차를 제도화한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에서는 내용보다 절차가 더 중요하다. 내용을 앞세워 절차를 무시하면 갈등과 혼란이 야기되고 민주주의는 살아남기 어렵게 된다.
미국은 민주주의 절차를 제도화하고 존중함으로써 성공을 이룩한 나라이다. 비교적 최근의 한 예를 상기해 보자. 2001년 6월 제임스 제퍼즈 상원의원이 공화당을 탈당함으로써 상원에서 공화당 대 민주당의 의석수가 50 대 50에서 49 대 50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민주당이 상원의 다수당이 되었고, 민주당은 상원의 20개 분과위원장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미국 대외정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상원을 민주당이 차지하는 결과를 가져온 이 사건에 대해 공화당은 결국 민주당의 다수당 지위를 인정하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민주당 지도부를 초청해 협조를 요청했다. 민주주의의 제도와 절차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절차무시, 민주주의 파괴 우려 ▼
이에 비해 20세기 초반 남미의 미국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되었던 아르헨티나는 민주주의의 절차보다 국민의 뜻을 앞세운 민중주의 지도자 후안 페론을 만나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페론은 기성 정당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국민들 속으로 파고들어 노동자, 농민, 하급군인들을 조직하고 동원해 기존 정치구도의 장벽을 넘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그 후 끊임없는 위기 속에 쇠락의 길을 걸었다. 과연 지금 한국은 어느 길로 가고 있는가.
정진영 경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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