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신은 한쪽 문을 닫으면서 또 한쪽 문은 열어 놓는다. 중국의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도 1986년 러시아의 체르노빌 원전사고처럼 잘하면 개혁과 개방을 부르는 촉매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체르노빌을 기회로 삼아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에 박차를 가했듯 중국의 후진타오도 이를 계기로 정치개혁에 나설 태세다. 당 간부를 해고하고 언론에 대해 정치집회보다 국민의 관심사항을 더 많이 보도해 달라고 말한 것도 한 예다.
▷21세기 첫 세계적 전염병으로 기록된 사스만큼 세계화의 명암을 극명하게 노출한 것도 드물다. 자유로운 해외여행 덕에 사스 역시 분방하게 세계의 국경을 넘나들 수 있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55년 역사상 처음으로 여행자제 권고를 내리는 등 전 지구적 모니터시스템을 강조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도 막기 힘든 ‘세균전’을 막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 같은 세계화 덕분에 새로운 ‘질병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가 생기고 있으니 어쩌랴. 세계의 중국식당이 파리를 날리고, 국경의 경계가 삼엄해졌으며, 환자가 아닌 이들도 서로 접촉을 피하는 폐쇄공포에 시달리고 있으니.
▷실상을 알고 보면 사스는 무서운 전염병이 아닐 수도 있다. 지난해 11월 첫 발병 이후 사스로 인한 사망자는 전 세계에 400여명 정도. 미국에서 인플루엔자로 죽는 사람은 해마다 2만∼3만명이고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로 죽는 어린이가 30초에 한 명인 것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영국에선 계단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이 매년 1500여명이니, 사스기침보다 무서운 게 계단일 듯싶다. 영국의 사회심리학자 피터 마시 박사는 “사람은 불확실하고 잘 모르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음모론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도 그 공백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사스가 아니라 두려움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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