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승지에 비하면 요즘 청와대 대변인은 별 힘이 없는 모양이다. 엊그제 참여정부의 첫 청와대 대변인으로 일하다 72일 만에 도중하차한 송경희씨는 “내가 정치란 걸 너무 몰랐어요. 자기들 잣대로 이리저리 재단하고 입맛대로 흔들면서 여기까지 왔네요”라고 말했다. 청와대 대변인이라면 정치 돌아가는 정도야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점에서 정치를 몰랐다는 것은 그의 미숙함이라고 치자. 그러나 ‘정치력 부족’ 탓이라면 이상하다. 대변인에게 무슨 특별한 정치력이 필요한가. 더구나 ‘자기들 잣대’와 ‘입맛대로’에 이르면 얘기가 전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자기들’은 누구이고 그들의 ‘입맛’은 또 어떤 것인가. 요즘 흔히 들리는 말대로라면 ‘코드’가 안 맞았다는 얘기 같은데 도대체 그 ‘코드’란 무엇이고 왜 그렇게 맞추기 어렵다는 것인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무슨 문제만 생기면 대변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이런 시스템을 받아들일 수 없다”던 송씨의 항변을 들으면 ‘코드’보다는 ‘대변인 브리핑’이라는 제도 자체에 더 큰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 그렇다면 사람을 바꾸기 전에 제도부터 바꾸는 게 옳은 순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잣대와 입맛’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대변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기자들은 그대로 받아쓸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내용이 보도를 통해 국민에게 전달된다. 이렇게 되면 국민의 알권리 보장은커녕 권력의 말과 국민의 이해간에 ‘코드’가 자꾸 어긋나는 것은 아닐까. 통합브리핑실을 정부중앙청사 본관에 만드느냐, 별관에 만드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자기들 잣대’와 ‘입맛대로’ 이곳저곳 대변인을 흔드는 식이라면 언론과의 건전한 긴장관계란 허구이기 십상이다. 신임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의 복심(腹心)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하니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잣대와 입맛’을 가늠해볼 일이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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