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을 수행했던 한 고위관리는 노 대통령이 미국에 코드를 맞추게 된 경위를 이렇게 전했다.
“미국은 정상회담 사전 조율과정에서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군사 경제제재 등 모든 선택을 배제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설명했다. 채찍이 있어야 당근이 효력을 발휘한다는 논리였다. 노 대통령이 고심 끝에 한미공조 전략을 선택한 것은 미국의 이 같은 입장을 이해하고 평화적 해결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고육책이라고 본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방미 성과를 놓고 논란이 분분하다. 언론과 인터넷에서 찬반 격론이 벌어지고 있고 전문가들의 평가도 엇갈린다. ‘방미 중 저자세 외교 논란’에 대한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온라인 투표에는 18일 오후 현재 1만2000여명이 참여했다. 54%가 ‘경제 군사적 현안을 해결했어야 하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답했지만, ‘북핵 문제 등에서 당당함을 잃어버린 것 같아 실망했다’는 부정적 반응도 36%나 됐다.
이번 논란의 특징은 방미 전과 비교해 지지층이 뒤바뀌었다는 점이다. 한미 갈등이 고조되는 것을 우려했던 보수 성향 인사들은 “한미동맹을 재확인하고 신뢰를 회복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반면 노 대통령을 지원했던 진보 성향 인사 중 상당수는 “저자세와 친미적 언행으로 일관한 굴욕적 외교였다“고 혹평하고 있다.
자칫하다가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둘러싸고 빚어졌던 남남(南南) 갈등이 재연될 조짐이다. 노 대통령이 또다시 말을 바꾸면 이 같은 갈등이 더 심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혹시 그가 미국에서 했던 얘기와 다른 말을 할 경우 모처럼 회복한 한미간의 신뢰는 물거품이 되고,지지와 비판 논쟁이 더 격화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한미 신뢰 붕괴에 따른 부작용은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를 되짚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당시 한국이 미국의 북핵 해법에 대해 사사건건 이견을 제기하자 미국은 한국정부와 사전협의 없이 영변핵시설 폭격계획을 수립해 시행 직전까지 갔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한반도의 위기 증대시 ‘추가조치’를 검토키로 한 마당에 한미간에 신뢰가 깨질 경우 미국은 또다시 대북 선제공격 계획을 독자적으로 추진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노 대통령은 방미 중 보여준 기조를 일관성 있게 유지하며 국론분열 방지에 적극 나서야 한다.
노 대통령의 방미 중 ‘변신’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도 그의 선택을 이해하고 지원해야 하지 않을까. 진보 성향 인사들은 노 대통령의 친미 언행보다는 그에 따른 대북정책의 급선회 가능성을 비판하고 있다. 햇볕정책을 계승하겠다고 다짐했던 그가 북핵-경협 연계방침을 밝힌 데 이어 “북한이 하자는 대로 따라 하지만은 않겠다”고 공언한 것은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에 굴복한 때문이라는 게 이들의 불만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서 ‘인도적 대북 지원은 핵문제와 연계시키지 않는다’는 약속도 받아냈고, 그 스스로도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경우 개혁 개방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평화와 통일을 원한다면 굴욕외교 논쟁으로 대통령을 곤경에 빠뜨릴 것이 아니라, 지금은 국론을 결집하는 것이 급선무다. 북한이 남한에 지원세력이 있다고 오판하면 남북협력의 가장 큰 걸림돌인 북핵 문제의 해결은 더 요원해진다. 대통령을 믿고 지원하는 것이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의 현실화를 막고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지름길이다.
김차수 정치부 차장 kimc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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