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 HOT]리글리 필드에 ‘이등병’이 떴다!

  • 입력 2003년 5월 20일 19시 02분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타자 최희섭(24·시카고 컵스)은 구름 위를 걷고 있다. 잘 정돈된 파란 잔디구장과 스탠드를 가득 메운 팬들, 그리고 선수단 주위를 늘 에워싸는 수많은 기자들. 고사리 손으로 야구 방망이를 쥐면서부터 꿈꿔오던 최고 선수들의 무대. 최희섭은 지금 바로 그곳에서 꿈을 즐기고 있다.

“메이저리그에 한국인 타자는 안 통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저는 한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해보지도 않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죠.”

2003년 메이저리그는 흥미로운 실험을 지켜보고 있다. 최희섭과 일본인 고질라 마쓰이 히데키(뉴욕 양키스). 근육질의 거포가 즐비한 메이저리그에 도전장을 낸 동양인 파워 히터들이다. 과연 아시아 야구가 힘으로도 미국에서 통할 수 있을까.

최희섭과 마쓰이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최희섭은 이제 막 프로 생활을 시작한 루키지만 마쓰이는 일본 프로야구를 8년간 겪은 베테랑이다. 한마디로 프로페셔널로서의 검증이 끝난 상태다. 마쓰이의 올 연봉은 700만달러. 최희섭은 30만달러에 불과하다.

야구에서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크다. 아마야구 최강으로 불리는 쿠바 국가대표팀 에이스로 활약했던 호세 콘트레라스는 15승 이상은 거뜬히 해낼 것이라는 기대를 받으며 뉴욕 양키스에 입단했지만 부진을 거듭하고 있다. 길어야 보름인 토너먼트 대회를 1년에 몇 차례 치르는 아마추어가 6개월간 162게임을 소화하는 프로야구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NBA 휴스턴 로케츠에 입단한 중국인 야오밍이 시즌 초반 극도로 부진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최희섭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아직은 조심스런 시선이 남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희섭은 올 시즌 자신의 두 번째 출전 경기인 4월5일 신시내티전에서 좌중월 3점홈런을 날리며 신고식을 마쳤다. 마쓰이는 4월9일 만루홈런을 때려냈다. 아시아의 초반 대공세는 일단 성공. ‘기술은 동양인, 힘은 서양인’이라는 공식이 지금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한국인은 작은 고추가 아니다

“저보다 무거운 방망이를 쓰는 선수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무거운 방망이는 약간 둔한 느낌이 있지만 오히려 더 편해요. 가벼운 걸 쓰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 헛방망이질을 하기가 쉽거든요.”

최희섭은 파워 히터로서의 기초체력을 완벽하게 갖췄다. 195㎝, 105㎏. 컵스 선수단 중 체구가 가장 크다. 방망이도 무거운 것을 선호한다. 그가 사용하는 것은 990g이 넘는 초중량급. 새미 소사나 모제스 알루 등 팀 내 간판 타자들도 최희섭의 방망이를 휘두르면 휘청거릴 정도다.

최희섭의 최근 별명은 ‘빅 초이’. 더스티 베이커 감독이 지난 3월 스프링캠프 때 인터뷰에서 최희섭을 빅 초이로 언급한 데서 비롯됐다. 이후로도 베이커 감독은 최희섭을 빅 초이로 부른다. 팀 동료들은 최희섭을 ‘히맨’ ‘초이’ 등으로 부른다. ‘히맨’은 198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만화영화의 주인공. 괴력을 지닌 정의의 화신이다. 최희섭의 별명은 이렇듯 큰 체구와 관련이 깊다. 서양인의 눈으로도 최희섭은 크다.

“구단이 저한테 요구하는 것이 뭔지 아세요? 홈런이에요, 홈런.”

신출내기 최희섭의 나침반은 또렷하게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팀 동료 새미 소사나 배리 본즈(샌프란시스코)처럼 홈런타자로 커나가는 것이다. 컵스는 지난 2000년 겨울, 팀 안팎의 반발을 뿌리치고 13년간 컵스의 간판으로 군림해온 마크 그레이스라는 붙박이 1루수를 과감하게 방출시켰다. 장타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중거리포 타자인 그레이스의 당시 평균 홈런수는 연간 11.7개에 불과했다.

컵스는 최희섭이 앞으로 최소한 10년간 팀을 대표하는 거포 1루수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지난 1999년 계약서에 사인을 할 때부터 그려둔 청사진이다. 좌 희섭, 우 소사가 바로 컵스가 계획하는 야심찬 프로젝트.

농구선수가 될 뻔한 키다리

최희섭은 송정초등학교 5학년 때 외삼촌 양형호씨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했다. 외삼촌은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 일본형사로 출연했던 탤런트로 최희섭의 든든한 후원자다. 최희섭이 계약서에 사인한 뒤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을 때도 동행했을 만큼 적극적이다. 어릴 적부터 거구였던 최희섭은 농구에도 탁월한 자질과 재능을 가지고 있다. 충장중학교 시절 잠시 농구부에서 활동했지만 야구부 감독이 호통을 치며 도로 데려가는 바람에 코트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야구부 감독의 힘이 강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때 농구부 감독의 파워가 셌다면 아마 NBA를 꿈꾸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최희섭은 이후 친구들과 길거리 농구 대회에 참가해 전국대회 우승까지 따내는 등 아마추어로는 꽤 이름을 날렸다. 얼마나 힘이 좋았던지 덩크슛을 날리다 백보드를 박살낸 적도 있다. 지금도 틈만 나면 농구를 즐긴다.

최희섭이 야구선수로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광주일고 시절부터다. 1학년 때 투수로도 활약하며 최고시속 140㎞ 이상을 스피드건에 찍었던 최희섭은 2학년 때부터는 엄청난 방망이 파워로 고교무대를 휩쓸었다. 1996년 1년 선배인 김병현(애리조나)과 함께 팀을 청룡기 우승으로 이끌었고, 1997년에는 황금사자기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 해 대통령배에서는 최다 홈런상을 받았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터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캐나다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맹활약하면서부터다. 최희섭은 그 해 9월 실시된 프로야구 드래프트에서 해태(현 기아)에 1차 지명됐다. 당시 해태가 최희섭에게 제시한 금액은 3억원. 메이저리그의 꿈을 간직하고 있던 최희섭은 아버지 최찬용씨를 끈질기게 설득, 이듬해 고려대로 발길을 돌렸다.

고려대 1학년 때인 1998년에는 국가대표로 뽑혀 이탈리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중심 타자로 출전, 준우승까지 일궈냈다. 당시 김병현 홍성흔(두산) 강혁(SK) 등과 함께 대표로 출전한 최희섭은 일본과의 8강전에서 3-5로 뒤진 9회초 삼진 13개를 뽑아내던 괴물투수 우에하라를 상대로 135m짜리 대형 장외 2점 홈런을 뿜어내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꿈으로만 간직해오던 메이저리그가 다가온 것도 이때다.

하나님과 치훈이 형

국제대회에서 명성을 날릴 그 무렵, 최희섭은 이치훈(33)씨를 만났다. 최희섭은 이씨가 건넨 에이전트라는 명함이 다소 생소했지만 ‘야구선수 출신’이라는 말에 호감을 갖고 흔쾌히 자신의 미래를 맡기게 된다.

광주일고 시절부터 최희섭을 눈여겨봐온 이씨는 메이저리그팀과 본격적인 접촉에 나섰다. 최희섭에 관심을 보인 구단은 모두 7개. 이 중 가장 적극적이었던 시카고 컵스는 극동담당 스카우터 레온 리를 한국에 파견하며 최희섭에 대한 모든 정보를 캐갔다. 스카우팅 리포트를 접수한 컵스는 최희섭에게 계약서 대신 초청장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미국에서 테스트를 한 뒤 입단 계약을 하자는 제안. 다소 위험부담이 있었지만 최희섭은 흔쾌히 응했다. ‘이왕 할거면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1999년 4월7일 최희섭은 이치훈씨와 외삼촌 양형호씨, 레온 리 등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성공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다짐을 굳게 하고서. 태평양을 건넌 지 6일 만인 4월13일. 최희섭은 드디어 계약금 120만달러에 컵스가 내민 서류에 사인했다. 한국인 최초로 타자가 메이저리그를 노크하는 순간이었다.

“미국에서 제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하나님과 (이)치훈이 형입니다. 힘들 때마다 정말 많은 힘이 됐어요.”

이씨는 최희섭을 한국인 최초의 타자 메이저리거로 키워낸 주역이다. 어쩌다 슬럼프에라도 빠지면 최희섭이 가장 먼저 찾는 사람도 바로 이씨였다. 둘은 선수와 에이전트 관계 이상이었다.

미국에 진출한 한국인 선수의 에이전트들은 불가피하게 비즈니스 이외의 일도 해야만 한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언어소통이 안 되고 외국생활 경험이 없다 보니 숙소 선정에서 은행구좌 개설 등 자질구레한 일까지 일일이 신경 써야 하기 때문이다. 이씨는 이 과정에서 최희섭에게 혼신의 힘을 다했고, 마침내 최희섭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씨는 현재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에이전트사 ‘홀 오브 드림스’를 경영하고 있다. 권윤민 류제국 등 컵스의 한국인이 모두 클라이언트. 외국인선수 4명도 보유하고 있다.

최희섭에게 이씨가 형이었다면 레온 리는 아버지였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선수로 활약한 레온 리는 동양인 선수들의 정서를 꿰뚫고 있었다. 그라운드에서는 누구보다 열심이지만, 야구장 밖에선 쉽게 외로움을 타는 최희섭을 따로 불러 저녁을 함께하며 고충을 들어줬다. 공식직함은 여전히 스카우터지만 감독보다 최희섭을 더 잘 알고 있는 이가 바로 레온 리였다.

한 예로 지난해 최희섭이 트리플A팀에서 갑자기 슬럼프에 빠지자 컵스 구단은 급히 스카우트팀에 있던 레온 리를 트리플A팀 타격코치로 임명했다. 흔들리는 최희섭을 바로잡기 위해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레온 리는 부임하자마자 최희섭과 함께 밤낮으로 타격 폼 가다듬기에 땀을 흘렸고, 마침내 9월 메이저리그 입성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맺었다.

주먹다짐 위기는 딱 한번

“정말 고생한 기억이 없어요. 진짜예요.”

미 프로야구 선수들은 마이너리그 생활을 흔히 ‘눈물 젖은 빵’에 비유한다. 최장 20시간씩 버스를 타고 이동했던 기억은 마이너리그를 거친 선수라면 누구든 가지고 있다. 모든 짐을 혼자 꾸려야 하고 부상을 당해도 특별히 돌봐주는 사람이 없다. 메이저리그 선수의 경우 경기 후 구단 요리사들이 마련한 따끈한 식사를 즐길 수 있지만 마이너리그의 경우에는 간단한 음료와 빵이 전부다. 그 빵을 다시 먹지 않기 위해 모든 선수들은 메이저리그를 꿈꾼다.

하지만 최희섭에게는 4년간의 마이너리그 생활이 즐거움이었다. 모든 것이 신기했고 배움의 연속이었다.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과 불편한 잠자리는 최희섭에게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최희섭은 빅 리그에 오르기까지 정통 코스를 밟았다. 빅 리그에서 호된 신고식을 치르고 다시 마이너로 떨어졌던 박찬호(텍사스)나 한국을 떠난 지 3개월만에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른 김병현과는 달리 싱글A부터 차근차근 단계를 거쳐온 것이다.

마이너리그 첫해인 1999년 싱글A 성적은 타율 3할2푼1리 18홈런 70타점. 외야수 코레이 패터슨과 함께 ‘컵스를 이끌 양대 유망주’로 꼽히며 슬슬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이듬해 더블A로 승격하자 ‘베이스볼 아메리카’는 주저 없이 최희섭을 ‘최고 유망주’로 꼽았다.

시련도 있었다. 손목과 손등 부상이 겹친 2001년은 스스로가 꼽는 최대의 위기였다. 당시 최희섭의 빅 리그 입성을 염두에 두고 주전 1루수 마크 그레이스를 과감하게 방출했던 구단으로서도 이만저만한 낭패가 아니었다. 구단은 결국 프레드 맥그리프라는 노장 1루수를 트레이드 해왔고, 최희섭은 마이너리그 생활을 1년 더 해야 했다.

무난한 성격의 최희섭은 동료 선수들과도 잘 어울렸다. 싱글A 시절부터 함께 한 외야수 코레이 패터슨과 2루수 바비 힐은 지금도 최희섭의 가장 절친한 친구다. 야구장 안에서는 서로의 장단점을 지적해주고, 경기 후에는 영화관람을 같이할 정도로 친하다. 최희섭이 그를 한국식당에도 숱하게 데려가 각자 단골 한식 메뉴가 있을 정도다.

최희섭은 딱 한 차례 팀 동료와 마찰이 있었다고 한다. 더블A 시절 이탈리아계 선수인 토니 쉬레거가 인종차별적 발언을 한 것이 발단이었다. 주먹다짐 직전까지 갔다가 다행히 별 불상사 없이 싸움은 끝났다. 스탠퍼드대학 출신의 수재인 쉬레거는 현재 최희섭의 절친한 친구다. 지난 2월 스프링캠프 때에는 손수 NBA 피닉스 선즈 경기 입장권을 구해 최희섭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최희섭은 2002년 9월4일 마침내 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았다. 그리고 2003년 개막전에는 당당한 선발 1루수로 출전했다. 4년간의 기다림이 준 선물이다. TV로만 보던 새미 소사와 같이 덕아웃에 선 것이다. 까마득한 목표를 향해 내디딘 자그마한 성과였다.

마이너리그에서의 생활은 메이저리그 생활을 밑받침할 든든한 재산이다. 그 시기 미국에서의 생활방식과 영어 등을 빠짐없이 체득한 것은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최희섭은 메이저리그 승격 후 통역 없이 언론 인터뷰를 한다.

“심심할 때는 산에 오릅니다. 운동도 되고 좋잖아요. 골프도 몇 번 해봤는데 공이 너무 많이 휘니까 재미가 없더라고요.”

최희섭의 일과는 무미건조하다. 여흥을 즐길 줄 모른다. 최희섭을 기억하는 이들은 ‘지독하게 야구밖에 몰랐던 선수’로 표현한다. 남들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때문에 밤의 문화에는 익숙하지 않다. 술도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

지난 2000년 이후 최희섭은 매년 겨울을 애리조나주 메사 인근에서 보냈다. 겨울에도 섭씨 20도 안팎을 유지하는 사막지역인 데다 야구장 및 웨이트 트레이닝 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어 훈련하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기 때문이다. 겨울이면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골프의 천국이기도 하다.

무료한 겨울을 보내던 최희섭은 지난해 골프 연습장을 찾은 적이 있다. 한국인 티칭 프로 H씨의 도움을 받아 간단한 스윙 요령을 배운 뒤 실전 연습에 들어갔다. 큰 체구에 맞게 처음 거머쥔 클럽이 드라이버. 헤드가 큼지막한 것이 자기 체구에 딱 맞다고 생각한 것이다.

“골프 스윙은 야구 스윙이랑 별 차이가 없습니다. 오른쪽 팔꿈치를 몸에 딱 붙이고 쳐야 하는 원리는 똑같습니다.”

첫 스윙 결과는 이론과 정반대로 나왔다. 냅다 드라이버를 휘둘렀지만 공 대신 클럽 헤드가 쑥 빠져 날아간 것이다. 드라이버를 빌려줬던 H씨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최희섭은 주위에서 연습하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클럽을 찾으러 야외 연습장을 한동안 뒤져야 했다.

차 욕심 많은 순진남

최희섭은 옷치장이나 액세서리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자동차에는 욕심이 많다. 운전을 하다 마음에 드는 차가 지나가면 넋을 잃고 바라본다. 주차장에 세워져 있을 경우 앞뒤를 오가며 차체를 꼼꼼히 관찰하곤 한다.

야구 선수들은 유달리 자동차 욕심이 많은 편이다. 선수 전용 주차장엘 가보면 최고급 메르세데스 벤츠나 BMW에서부터 롬바르기니 등 스포츠카까지 특색 있는 차들이 줄을 서 있다. 랜디 존슨(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이나 새미 소사 등은 20대 이상의 차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요일별로 자동차를 바꿔 타도 남는다’는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다.

최희섭이 현재 타고 다니는 차는 빨간색 혼다 패스포트. 큰 덩치 때문에 승용차 대신 SUV를 고른 듯하지만 나름의 고충이 있다.

“마이너리그 생활을 하다 보니 짐을 싣고 이동할 일이 많았어요. 승용차로는 어림도 없죠. 야구장비 몇 개만 넣으면 자동차가 꽉 찹니다.”

최희섭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차는 군용차를 개조한 허머(Hummer)다.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영화에서 타던 모습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단다. 지금도 허머만 지나가면 하던 일을 딱 멈추고 시선이 고정된다. “메이저리그에서 고액 연봉 계약을 하고 난 뒤 가장 먼저 할 일은 허머를 사는 것”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호텔 생활을 주로 하는 최희섭은 매끼 외식을 한다. 주로 한식을 즐기지만 양식도 마다하지 않는다. 미국 생활 초기에는 불고기 5인분을 순식간에 해치울 정도였지만 최근에는 밥 한 공기로 털고 일어서는 소식가로 변했다.

“밥하는 시간에 스윙 한 번을 더 하는 게 낫습니다. 지금은 맛없는 밥을 먹어도 돼요. 요리를 배우려고도 생각해봤지만 시간이 아까워서 못했습니다.”

무뚝뚝한 최희섭이지만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역시 외로움이다. 한창 데이트를 즐기고 간혹 나이트클럽에서 스트레스를 풀 나이지만 아직은 야구뿐이다. 객지생활에 이골이 난 최희섭이지만 “아플 때 혼자 있는 게 제일 괴로웠다”고 털어놓는다.

최희섭에게도 여자친구는 있다. 애리조나 교회에 다니다 만난 친구로 사귄 지 햇수로 2년이 넘었다. 겨울이면 여자친구와 가끔 쇼핑도 하고 식사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최희섭은 “결혼까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친구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시카고 지역 언론의 한 여기자는 지난해 “최희섭은 미국에 온 지 4년 동안 단 한번도 한국을 방문하지 못했다. 한국에 있는 여자친구 역시 4년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기사를 게재한 적이 있다. 이때 화들짝 놀란 최희섭은 이 여기자에게 다가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 다음날 신문은 자그많게 정정 기사를 실었다.

“최희섭의 여자친구가 한국에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애리조나에 있는 여자친구가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

한국인 첫 신인왕을 향해

“프로생활을 시작한 이상 신인왕은 꼭 받고 싶습니다. 이제 더 이상 ‘유망주’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요. 확실한 결과로 뭔가 보여주는 게 올해 목표입니다.”

한국인 첫 타자 메이저리거 최희섭은 이제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내딛는 걸음마다 ‘한국인 사상 최초’가 된다. 최희섭은 또 하나의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신인왕. 연봉 1200만달러를 받는 박찬호(텍사스)도,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손에 쥔 김병현도 오르지 못한 고지다. 최희섭은 이미 지난 겨울 현지 언론들로부터 내셔널리그의 신인왕 후보로 꼽힌 바 있다.

최희섭은 멀티플 플레이어다. 수비는 이미 평균 이상의 점수를 받고 있고, 큰 체구에 못지않게 발도 빠르다. 선구안도 좋다. 투수들이 던지는 유인구를 골라내는 능력도 지녔다. 최근 미국 스포츠전문방송 ESPN은 ‘큰 체구의 선수답지 않게 좋은 눈을 가졌다’며 그를 극찬한 바 있다.

고려대 시절 최희섭은 아마추어 야구인들에게 ‘공갈포’로 불렸다. 어쩌다 하나 걸리면 장외 홈런도 곧잘 나오지만 어이없는 공에 헛스윙하며 삼진을 당하는 횟수 또한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가대표 시절 최희섭을 4번에 기용했던 신현석 감독은 “변화구에 헛스윙만 하지 않으면 저만한 타자가 없는데…”라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최희섭은 4년간의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치며 ‘공갈포’라는 지긋지긋한 꼬리표를 확실하게 떼어냈다. 악착같이 노력한 결과다.

최희섭은 홈구장 리글리 필드의 이등병이다. 그라운드에서는 혼신의 힘을 다하고, 클럽하우스에서도 허튼 움직임이 없다. 한국인 손윗사람을 만나면 거의 90도로, 허리를 굽혀 절을 하기도 한다. 라틴 음악을 틀어놓고 맥주를 즐기는 말년 병장 새미 소사의 여유는 최희섭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긴장의 연속이지만 최희섭은 “야구를 이렇게 재미있게 한 적이 없다”며 싱글벙글이다.

최희섭에게는 패기가 있다. 새미 소사가 하지 못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꿈도 있다. 입을 꽉 다물고 베이스를 뛰는 모습에서는 프로페셔널의 진지함이 엿보인다. 이등병의 새벽이 밝았다.

<신동아 5월호 (통권 524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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