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폭소'…아이러니로 점철된 우리네 인생

  • 입력 2003년 5월 23일 17시 21분


작가 권지예의 이야기는 극과 극을 하나로 이어주는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케한다.사진제공 문학동네
작가 권지예의 이야기는 극과 극을 하나로 이어주는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케한다.사진제공 문학동네
◇폭소/권지예 지음/296쪽 8500원 문학동네

‘시지프’라는 아이디를 가진 이가 느닷없이 한 통의 e메일을 보내왔다. 희망도 절망도 무의미해진 삶을 푸른 바다에 던지겠다는 내용. 아마도 그는 바윗덩이와 함께 바다에 묻힐 모양이었다.

표제작 ‘폭소’에 등장하는 소설가는 컴퓨터 앞에 앉아 고민한다. 답장을 할까? 억지스러운 답을 하기에는 어쩐지 망설여지는데….

‘삶이란 건 숨이 막힐 정도로 아귀가 꼭 맞게 돌아가야 하는 바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만의 굴렁쇠를 굴리다가 때로는 놓치기도 하는 것. 놓쳐버린 굴렁쇠처럼, 가끔은 삶이 주는 그런 우연성. 삶이란 것이 얼마나 인간의 의지를 배반하는 우스꽝스러운 것일 수 있는지를, 나는 그에게 말하고 싶은 걸까.’

권지예(43)는 이 두 번째 소설집을 통해 아이러니로 점철된 삶의 모습, 알고 나면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는 일상의 면면과 인간의 손 밖에 놓인 우연을 놀라운 반전과 속도감으로 그려낸다.

여자는 말없는 전화와 낯선 우편물 공세에 시달린다. 두려움을 피해 언니의 집에 잠시 머무르지만 치매로 정신을 놓아버린 시아버지도 언니에게는 스토커나 다름없었다. 여자는 휴대전화에 표시된 발신자 번호로 계속 전화를 걸고, 언니는 여자에게 ‘네가 스토커 같다’고 말한다. 작가는 독자에게만 ‘마수(魔手)’의 정체를 넌지시 일러준다. 그는 어이없게도 불안 심리를 이용해 보험 실적을 올리는, 여자의 단골고객. (‘스토커’)

‘폭소’의 ‘시지프’는 한때 행복에 젖어 일기를 쓴 적도 있다. 개나리꽃에서 아기 새들의 여린 부리를 보는 아내, 결혼 3년 만에 얻은 아들, 널 지키겠다는 아빠로서의 다짐…. 늦된다고 생각했던 아이는 부모조차 알 수 없는 세계에 자신을 은폐시키고 있었다. 아내는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에게 헌신하지만 희망은 더 큰 고통을 부를 뿐. 무조건적인 사랑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고통은 ‘폭소’가 돼 아내에게서 터져 나온다.

작가가 풀어내는 인생은 극악스럽고, 인간을 우습게 배반한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맞잡은 손처럼(‘폭소’) 한 번쯤은 웃으며 뒤돌아 봐주는 생(生)에의 긍정이 있어 건조하지 않다.

전작들에서 가족사와 죽음에 천착해 온 작가는 이제 자신의 방에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 타인의 움직임에 가닿는 시선이 정교하고 세심하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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