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에 비하면 북한 핵은 훨씬 쉬운 대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독일보다 복잡한 길을 택했다. 독일은 4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2(동, 서독)+2(미국, 구소련)’라는 절묘한 방법을 통해 통일을 달성했으나 우리는 북한 미국 중국의 3자회담이라는 기형적 체제로 숙제를 풀려 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 주도권을 넘긴 셈이니 바르의 충고는 이미 허공에 뜨고 말았다.
북한이 줄기차게 북-미 협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3자회담은 커지면 커졌지, 양자회담으로 축소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다면 다자회담은 옳은 해법인가. 유감스럽게도 수긍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이미 다자회담의 고통스러운 과정과 무기력을 경험했다. 남북한과 미국 중국은 97년 12월부터 99년 8월까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4자회담’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의 회담을 6차례나 가졌으나 신통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4개국 대표단이 만나기는 했지만 핵심은 언제나 북-미 양자접촉이었고, 북한이 요구한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 주한미군 철수는 모든 논의의 진전을 가로막았다.
우여곡절 끝에 다자회담의 틀이 만들어진다 해도 각양각색인 참여국들의 시각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 한미 정상회담에서 ‘추가적 조치(further steps)’로 표현된 대북 압박은 미일 정상회담에서는 ‘더 강력한 조치(tougher measures)’로 변했다. 중국과 러시아 정상은 “북핵사태 해결을 위한 어떤 군사적 위협이나 행동도 수용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G8(서방 선진7개국+러시아)까지 끼어들어 북핵 포기를 촉구했다.
이제는 다자회담 틀 속에서 ‘누가 우리 편이 되고 누가 북한 편이 될 것인가’까지 걱정해야 한다. 5자회담으로 낙착된다면 6자회담 후보인 러시아는 무슨 명분으로 배제하고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북한이 북-미 협상을 포기하지 않으면 다자회담은 4자회담의 재판이 될 텐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쯤 되면 다자회담은 ‘덫’이다. 우리가 덫을 놓을 수도 있고, 누군가가 쳐놓은 덫에 우리가 걸릴 수도 있다. 다음주 미국 호놀룰루에서 한미일 3국의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 회의가 열리지만 묘책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이야말로 바르의 충고를 되새길 때인 것 같다. 북-미 회담을 고집하는 북한에 맞서 ‘남북협상 병행’ 카드를 내밀면 어떨까.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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