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속임수/버나드 골드버그 지음 박정희 옮김/351쪽 1만3000원 청년정신
1996년 2월 8일. 미국 CBS TV 시사프로그램 ‘현장점검’은 대통령후보였던 스티브 포브스의 선거공약을 다룬 이렉 엥버그 기자의 보도를 방영했다.
포브스씨는 당시 ‘돈 많고 보수적’이라고 알려졌던 후보. 엥버그 기자는 “포브스 후보의 일률과세 계획(Scheme)이 우리를 괴롭히는 경제문제에 대한 만병통치약(Elixir)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코멘트로 뉴스를 시작했다.
‘Scheme’이라는 단어에는 음모의 뉘앙스가 짙게 풍긴다. ‘Elixir’ 역시 차력시범으로 약을 파는 돌팔이 약장수를 떠올리게 하는 용어.
엥버그 기자가 인터뷰한 세금전문가 3명은 모두 일률과세에 반대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 시카고대 경제학과 교수 등 일률과세를 지지하는 전문가의 인터뷰는 나오지 않았다. 이어 엥버그 기자는 “일률과세 공약의 가장 어리석은(Wackiest) 첫 번째 이유는…”이라며 서슴없이 비하적인 표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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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뉴스국에서 25년간 기자와 PD로 일하면서 에미상을 수상한 저자는 보수적인 ‘월스트리트 저널’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이 프로그램을 비판했다가 동료들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힌 뒤 CBS를 떠났다.
저자는 “미국 주요 TV뉴스를 제작하는 앵커와 기자들이 진보 편향을 갖고 있다”고 단언하면서 그 같은 편향이 어떻게 뉴스를 왜곡시키는지에 대한 다양한 증거를 특유의 독설과 비유로 제시했다.
보통 뉴스앵커들은 보수파에게는 이름 앞에 ‘보수주의자’라는 수식을 달지만 진보파에게는 아무런 수식을 달지 않는다. ABC TV의 앵커 피터 제닝스는 1999년 빌 클린턴 대통령 탄핵안에 대한 상원의원들의 투표를 생중계하면서 공화당 의원의 경우 “켄터키주의 매코넬 의원입니다. 공화당에서도 아주 확고한 보수주의자입니다”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민주당 내 진보주의자를 소개할 때는 “메릴랜드주의 미컬스키 상원의원입니다”라고 언급했을 뿐이다.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무수히 등장하던 노숙자 관련 보도는 민주당의 클린턴 대통령 시절에는 자취를 감췄지만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집권하자 3주 만에 ABC ‘월드뉴스 투나잇’에 다시 등장했다. 이런 현상도 ‘진보 편향’ 또는 ‘민주당 편향’에서 비롯된다는 것.
저자는 ‘진보 편향적’ 뉴스 진행자들이 ‘노숙자’ ‘동성애자’ ‘소수인종’ ‘에이즈 감염자’ 등을 사회적 약자로 다루면서 어떻게 왜곡된 여론을 유도하는지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들이 처한 현실의 안타까움만 강조할 뿐 이들이 왜 이런 처지에 빠졌는지는 생략함으로써 진실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에이즈 감염자 중 대부분은 정맥에 주사바늘을 찔러대는 마약복용자이거나 동성애자이지만 CBS의 ‘48시간’ 프로그램은 ‘이웃에 사는 킬러’라는 선정적 제목을 달아 정상적인 사람에게도 에이즈가 광범위하게 퍼질 수 있다는 식으로 결론을 유도했다고 꼬집는다.
TV 뉴스가 기독교 보수주의자, 남성 등에 대해서는 학대에 가까운 용어를 써가며 비난하고 있지만 여성 및 소수인종 등에는 지나칠 정도의 과보호와 호의를 갖고 대한다는 질타도 빠지지 않는다.
물론 당사자들은 스스로를 중도파라고 믿으며 진보적 편향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생각하는 뉴스 왜곡의 비극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보도할 뿐이라고 믿는다. 1996년 한 조사에 따르면 워싱턴 내 의회 담당기자와 지국장 중 89%가 1992년 대선에서 클린턴 후보를 찍었고 7%만이 부시 후보에게 투표했다.
저자는 미국 TV뉴스의 진보 편향 때문에 뉴스시청률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1980년 CBS, ABC, NBC방송국 뉴스의 시청률은 75%에 달했지만 지금은 43%에 불과하다. 물론 인터넷의 보급 등의 영향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미국인의 실제 생각과는 다른 미디어 종사자들의 진보적인 편향이 외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저자 골드버그가 보수 의식에 젖어 건전한 진보주의적 비판까지 무차별 공격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미디어종사자의 선입견이 ‘입장’을 넘어 명백한 사실 자체의 왜곡을 가져올 위험을 생생한 실례를 통해 경고하고 있다.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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