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120년 전에 쓰인 니체의 차라투스트라(Zarathustra)는 아직도 위험한 텍스트이다. 그리고 ‘초인(¨Ubermensch)’과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ewige Wiederkehr des Gleichen)’로 수렴되는 이 텍스트의 골수를 직조해내고 그의 혀를 빌려 설파된 니체 사상의 ‘위험성’은 이후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저마다 ‘우리 시대의 니체’와 ‘나의 니체’를 갖게 만든 원인이 된다. 왜냐하면 저 사상의 위험성을 수용하는 각 시대의 도덕과 독자들 나름의 가치 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가령,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나치에 의한 ‘제3제국 시대의 니체’가 있는가 하면 ‘들뢰즈의 니체’도 있는 터이다. 이 위험한 니체의 텍스트가 이제 박상륭이라는 한 거장의 작가에 의해 탄생한 ‘神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라는 새로운 텍스트를 통해서 재-전복되는 놀라운 풍경을 우리는 지금 목격하고 있다. 박상륭의 텍스트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고지한 ‘죽은 신’의 부활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역으로 박상륭의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텍스트가 예고한 ‘초인’의 죽음을 고지하는 것이리라.
‘칠조어론(七祖語論)’ 이후 10년 만에 나온 박상륭의 신작 장편 ‘神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는 ‘속·산해기(續·山海記)’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기존의 산문집 ‘산해기(山海記)’의 속편이란 뜻이겠는데, 전편이 ‘산문집’이고 후편이 ‘장편소설’이라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박상륭의 작품 세계에서 산문과 소설에는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더 심하게 말하자면, 박상륭의 문학에는 심지어 운문과 산문의 장르적 경계도 지워져 있다. 내가 보기에 박상륭의 산문과 소설은 어떤 시보다도 더 시적이다.
수많은 다른 요인들을 괄호 치고 말하기로 한다면, 바로 이 같은 모든 이분법적 경계의 극복과 초월이 박상륭의 문학을 하나의 ‘말씀의 우주’로 만드는 소인이 된다. 거기에는 물론 모국어의 가능성과 한계의 극한을 시험하고자 하는 듯한 파격적인 언어와 문체의 사용 및 산문 예술의 장르적 관습과 문법을 넘어서는 실험적인 정신과 글쓰기의 고투가 한몫을 한다는 사실도 부가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점들이야말로 박상륭의 문학을 날림의 ‘가짜’ 문학이 판치는 시대에 ‘진짜’ 문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또 진짜 예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일깨워주는 성좌가 되게 하는 것일 터이다. 문학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세 치도 못 되는 혀를 놀리는 대신 다만 손가락으로 박상륭을 가리킬 것이다.
우리의 모국어는 이 거장을 통해서 한층 정련된 정신적 부피와 두께를 마련했으며, 우리 문학의 숲은 ‘神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와 더불어 한층 포괄적인 예술적 넓이와 깊이를 확보하게 되었다. 머지않은 장래에 다시 쓰일 문학사는 ‘박상륭과 그의 시대’를 독립된 한 장으로 마련하기 위한 꽤 두툼한 여백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독일인들에게 최고의 산문인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있다면, 눈물겹도록 고맙고 행복하게도, 아, 우리에게는 박상륭이 있는 것이다!
김진수 문학평론가·계간 ‘문학·판’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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