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고승철/‘1만달러’ 그리고 ‘2만달러’

  • 입력 2003년 7월 9일 18시 39분


칭기즈칸의 성공 비결 가운데 하나다. 그는 지휘관을 철저히 실적에 따라 발탁했다. 비천한 가문의 병사라도 자신의 노력만으로 사령관이 될 수 있었다. 이런 기대감 덕분에 병사들은 온 힘을 다해 싸웠다. 칭기즈칸은 실적주의를 과감하게 도입함으로써 인간의 능력을 극대화한 것이다.

몽골이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이후 몽골 상류층은 호화생활에 빠졌다. 귀족의 창고엔 금은보화가 넘쳤고 귀부인들은 페르시아, 헝가리 등지에서 들여온 옷감으로 옷을 지어 입었다. 이들은 호사스러운 향연을 자주 벌였다. 씀씀이를 유지하기 위해 자식들을 노예로 파는 패덕자(悖德者)도 나타났다. 몽골제국의 흥망을 압축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례다. 로마제국의 흥망사도 이와 비슷하다.

오늘날 한국은 어떤가. 1인당 국민소득이 8년째 1만달러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다. 1995년 1만달러를 돌파해 샴페인을 터뜨렸고 외환위기 이후 한동안 움츠렸다가 경제가 되살아날 기미가 보이자 신용카드 빚으로 흥청망청 잔치를 벌였다.

몽골이나 로마 때와는 달리 요즘은 국력의 척도가 영토 넓이보다는 나라 전체의 국내총생산(GDP)이 됐다. 개인의 삶의 질(質)은 대체로 1인당 국민소득으로 비교된다. 국민소득이 높다 해서 삶의 질이 높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인권, 환경, 자유, 복지 등 여러 면에서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선진국들은 대부분이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넘는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느니 ‘항산 항심(恒産 恒心)’이라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국민소득을 2만달러로 높이겠다는 수량적인 목표가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1만달러 수준의 ‘중진국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길은 어디에 있을까. 동아일보에 7월 1일자부터 연재 중인 ‘1만달러서 주저앉나’란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자유’와 ‘절제’란 2개의 키워드가 떠올랐다.

몽골군의 놀라운 용맹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한 데서 비롯됐다. 자신의 열정만으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다’는 평등주의가 널리 퍼진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한국사회엔 교육의 하향 평준화에서 실감하듯 평등주의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석학 하이에크는 저서 ‘치명적 자만(Fatal Conceit)’에서 풍요와 평등을 동시에 실현한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설파한 바 있다.

내 몫을 챙기겠다고 너도나도 거리에 나서는 무절제 사회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표(票)를 의식해서 무책임한 약속을 남발하는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적 정책을 펼치면 나라를 망친다. 사회적 약자를 돕겠다는 정의감은 당연히 존중돼야 하겠지만 정교한 실행 장치를 갖추지 않은 즉흥적 약자 지원책은 오히려 그들의 삶을 옥죌 수 있다. 일부 이익집단이 절제의 한계선을 넘어서면 사회공동체엔 구심력보다 원심력이 더 크게 작용해 분열이 촉진될 따름이다.

이제 2만달러를 이루는 길이 보이지 않는가. 바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생산의 주체인 기업들이 ‘기업하기 좋은’ 무대에서 춤추게 하면 될 것 아닌가. 또 하나, 분출하는 욕망을 절제하는 사회적 시스템을 갖추면 될 것 아닌가.

고승철 경제부장 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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