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일상적인 것 하나가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얽어매 왔던 거대한 이데올로기를 단숨에 넘어서게 하는 그 무엇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어떤 증좌였다. 영화에서 남한 병사가 북한 병사에게 건네준 것은 ‘소박한 마음’이었다. ‘작은 것’의 신화가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선물 금지한다고 뇌물 사라질까 ▼
한국문화는 오랫동안 정(情)의 문화였고 마음(心)의 문화였다. ‘이심전심(以心傳心)’, ‘역지사지(易地思之)’,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노무현 정부 출범 후 첫 명절인 추석이 다가오면서 선물을 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의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주당 정대철 대표는 지난달 31일 역대 대통령에게서 받은 명절 선물을 공개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추석 선물을 할 것을 권유했다. 정 대표는 “선물은 한국문화인데 노 대통령은 전혀 선물이 없어 자칫 정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부연했다.
청와대는 즉각 1일 노 대통령이 복분자술과 한과 세트를 추석선물로 돌릴 것이라고 밝혔지만, 이날 모 은행장은 직원들에게 명절 선물을 일절 받지 말라고 지시하는 등 ‘선물 논란’이 이어졌다.
선물을 주는 것은 마음을 중시하는 한국문화의 중요한 심성이다. 과거 우리 선조들은 자식의 공부를 가르치는 서당 훈장에게 달걀꾸러미를 갖다 주었고 명절이 되면 음식을 나눠 먹었다. 한때는 나일론 양말이 신기한 선물이었고, 양담배와 양주가 귀한 선물의 표본이 되기도 했다. 직장에 들어가 첫 봉급을 타면 부모님께 내의를 선물했다.
그러나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마음도 오염되고 순수함도 바래 갔다. 물건은 물신화되고 선물은 이해타산의 속셈이 담긴 어떤 것이 되어 버렸다. 지난 정권 때 옷로비 사건이 그러하고 스승의 날 케이크 상자에 동봉하는 돈봉투가 그러하다. ‘마음을 드린다’는 말이 있지만 진정한 고마운 마음은 어디로 가고 선물 안에는 철저한 이해관계의 논리만 남게 됐다.
한국후지제록스는 최근 S백화점에서 상품권 3억원어치를 구입했다고 한다. 굳이 S백화점을 택한 데는 사연이 있다. 후지제록스는 2001년 상반기에 그 백화점 계열사가 복사기와 프린터를 자사 제품으로 교체한 데 대한 고마움으로 담당 간부에게 배 한 상자를 보냈다. 그러나 그 간부가 선물을 정중하게 거절하자 후지제록스는 S백화점의 윤리경영에 대한 감동의 표시로 상품권을 구입했다는 것이다. 최근 기업의 모토가 ‘가치경영’에서 ‘윤리경영’으로 바뀌어 가면서 기업은 정직함과 윤리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고 있다.
사실 뇌물과 선물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힘든 상황에서 선물을 받아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뇌물은 한국사회를 부패하게 만든 핵심적 병폐였다.
추석을 앞두고 선물 논란이 이는 것은 이와 같이 한국민의 전통적인 인지상정과 합리적 윤리를 찾겠다는 선진화 표지(標識) 사이의 딜레마다.
▼ 속셈 아닌 情 담긴 선물이라면 ▼
그러나 우리 사회의 문제는 한국적인 방식으로 풀어야 한다. 한국 토착문화는 오랫동안 공동체적 유대와 정서에 기반을 두어 왔다. 물론 ‘정 이데올로기’가 한국사회의 병폐인 불합리성과 집단주의를 부른 측면은 있지만, 인지상정은 한국사회를 이루는 근원적이며 관념적인 힘이었다.
명절 때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양식에 맡겨야 할 미풍양속의 문제다. 뇌물을 하자고 마음을 먹으면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도 할 수 있다. 어음부도사건이 많이 난다고 해서 어음을 없앨 수 없다. 야만을 야만의 방식으로 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만 선물은 JSA 영화에서처럼 ‘작은 것의 신화’를 찾는 방향이어야 한다. 매너리즘과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진정한 마음이 전달되도록 해야 한다. 진심은 언제나 드러나는 법이다.
김용희 평택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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