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안세영/한국경제 희망은 있다

  • 입력 2003년 9월 4일 18시 31분


1894년 영국왕립지리학회 회원이며 세계적 여행가였던 이사벨라 비숍 여사가 조선 땅에 첫 발을 내디딘다. 그녀의 조선에 대한 첫 인상은 절망적이었다. “이렇게 더럽고 게으르며 부패한 사회는 처음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주와 시베리아를 여행하며 여사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현지에서 조선반도에서와는 전혀 다른 조선인의 모습을 본 것이다. 하바로프스크의 조선인은 채소 공급을 거의 독점하고, 만주에선 중국인보다 훨씬 더 잘 살고 있었다. 결국 여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조선을 떠난다. “조선인은 무한한 잠재력을 지녔다. 이들이 언젠가 좋은 지도자와 국가시스템을 만나면 훌륭한 나라를 만들 것이다.” 여사의 예언대로 1세기도 지나지 않아 유능한 지도자를 만난 한국인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냈다.

▼브라질-체코와는 구조-체제 달라 ▼

이제 우리의 관심은 내친 김에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가이다. 여기에 대한 답은 자본주의 역사를 통해 찾아야 한다. 지난 100년 동안에 크게 브라질, 체코, 터키, 아시아의 네 마리 용 등 10여개국이 중진국 진입에 성공했다. 그러나 많은 나라들이 선진국이 되기 위해선 꼭 넘어야 할 ‘마(魔)의 장벽’을 못 넘고 주저앉고 말았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산업구조가 나빴거나, 외부적 체제변화의 충격을 못 이겨냈든지 또는 나라를 잘못 다스렸기 때문이다. 산업구조가 나빴던 전형적인 예는 브라질형 단일경제이다. 이는 한 나라의 수출이 한두 가지의 특정 품목에 매달리는 것을 말한다. 한때 고무수출로 번영을 누리던 브라질은 말레이시아가 값싼 고무를 생산해내자 쇠락하고 말았다.

다음은 체코형 체제몰락이다. 경제는 좋은데 외생적 정치체제의 충격을 이기지 못해 나라가 주저앉는 것이다. 1920년대 이미 자동차를 대량생산했던 체코는 공산화와 함께 이류 공업국으로 전락했다. 마지막은 아르헨티나형 포퓰리즘이다. 한때 미국과 어깨를 겨루던 이 나라는 노동자의 천국을 꿈꾸던 페로니즘에 의해 ‘다 같이 잘 살지 못하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그간 탈락하지 않고 남은 두 나라는 한국과 싱가포르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부러워하던 싱가포르의 지난 분기 성장률이 마이너스 10%대로 떨어지고 실업률은 4%를 넘어섰다. 정보기술(IT) 수출에 너무 의존하다가 IT 거품이 꺼지고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악재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위기는 외국 기업들이 이 나라보다 더 매력적인 중국의 상하이를 찾는다는 데 있다. 그간 외국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빌딩, 항만과 같은 하드웨어에만 집중 투자하고 인적자본과 자체기술 개발에 대한 투자를 게을리해온 이 나라는 중국 경제의 부상이라는 새로운 위기에 당황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철강에서 IT 제품까지 세계가 부러워하는 전천후 수출구조를 가진 한국은 브라질처럼 주저앉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체코형 악몽이 우리 경제를 덮칠까? 북한 핵과 주한미군 문제를 잘못 다루면 한국 경제는 위협적 군사력을 지닌 북한에 발목을 잡혀 질질 끌려 다니는 ‘승자의 저주’에 빠질 우려가 크다. 그러나 일단 6자회담이 진행되는 한 그 결과를 기대해볼 만하다.

▼ 남미형 포퓰리즘 막을 리더십 절실 ▼

이제 마지막까지 남아 선진국을 넘보는 나라는 한국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모든 계층이 소리를 높이고 리더십이 상실된 듯한 혼란상을 보고 있노라면 분명 인재(人災)가 우리 경제를 남미형으로 몰고 가는 것 같다. 이를 입증하듯 한때 만연하던 이민 열기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은 있다. 역사적으로 민주화하지 않고 선진화에 성공한 나라는 없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의 혼란은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가 꼭 거쳐야 할 학습과정일지도 모른다. 이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국가시스템만 바로 잡으면 아르헨티나형의 덫에 빠지지 않고 선진국이 될 희망이 있음을 의미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하루 빨리 집권 초기의 국정학습을 마치고 강한 리더십을 발휘해 비숍 여사가 말한 한민족의 잠재력을 폭발시키는 역사 속의 지도자로 부각되기를 바랄 뿐이다.

안세영 객원 논설위원·서강대 교수 syahn@ccs.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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