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김춘수, '흔적'

  • 입력 2003년 9월 5일 17시 54분


망석이 어디 갔나.

망석이 없으니 마당이 없다.

마당이 없으니 삽사리가 없다.

삽사리가 없으니

삽사리가 짖어대면

달이 없다.

망석이 어디 갔나,

-시집 '거울 속의 천사'(민음사)중에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마당이 없으니 망석(멍석)이 없지, 망석이 없어서 마당이 없어졌을까. 망석을 새로 짠다고 없는 마당이 생겨날까? 또, 삽사리 없다고 달이 없어질까?

늙고 허리 굽어 금년부터 부지깽잇감 하나 꺾을 힘 없어진 시골 어머니가 도시에 사는 아들네에 ‘얹혀 살러’ 왔다. 평생 밭 갈아 씨 뿌리고, 가을걷이하던 몸이 하릴없이 깨끗한 고층 아파트 베란다를 서성이며 중얼중얼 주섬주섬 망석을 찾는다. 유리창 너머엔 아찔한 공중정원뿐. 고추도 널고, 호박고지도 널고, 묵나물도 삶아 널던 망석이 없어졌다. 그러나 없어진 게 망석뿐일까? 콩망석 팥망석 추스르며 함께 널어놓았던 자신의 젖은 삶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누가 저이로부터 온 생애의 흔적을 몽땅 멍석말이해 갔나?

망석이 어디 갔나? 망석이 없으니 텃밭이 없고, 장꽝이 없고, 마침내 흔적뿐인 어머니가 희미해진다. 세상에 저리도 긴 미완성 시가 있나, 시인은 쉼표만 찍어놓고 어디로 갔을꼬. 망석을 찾으러 갔을까? 글쎄, 저 망석을 누가 걷어갔을꼬?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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