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이렇게 하지만 젊은 직장인들의 마음속에는 연민과 안타까움이 더 짙게 배어있다. 한 30대 여성 회사원은 “아침에 기러기아빠 상사의 책상에서 빈 빵 봉지를 발견하고 눈물이 날 뻔했다”고 한다. 텅 빈 사무실에 혼자 남아 빵 조각으로 저녁을 때우는 한국의 아버지상이 떠오르더라는 것이다. 어디 아버지뿐이겠는가. 남편과 생이별해 말도 잘 안 통하는 나라에서 외롭게 살아야 하는 아내인들 따뜻한 세끼 밥을 먹을 리 없다. 자녀를 위해 이처럼 헌신적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부모가 세계 어느 나라에 또 있을까.
한국 부모의 유별난 자녀사랑은 가정뿐 아니라 국가경제의 운영에서도 나타난다. 공적자금이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해 한바탕 논란을 거친 끝에 공적자금의 상환기간은 25년으로 정해졌다. 우리 세대가 진 빚을 후세에 떠넘길 수 없으니 우리 세대가 모두 갚자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상환기간을 더 길게 잡자는 주장도 방법론의 차이일 뿐 취지는 똑같았다. 공적자금을 단기간에 무리하게 상환하면 경제성장률이 떨어져 오히려 후세가 피해를 본다는 논리였다. 몇 년치 국민소득으로도 갚지 못할 만큼 엄청난 규모의 나랏빚을 지고도 후세에 미안해하지 않는 선진국들이 적지 않다. 한국의 미래 세대는 현 세대에 깊이 감사할 일이다.
최근 국민연금을 둘러싼 논란은 이런 한국의 부모상과 기묘한 부조화를 느끼게 한다. 정부가 국민연금의 재정 붕괴를 막기 위해 연금지급액은 줄이고 보험료는 올리겠다고 하자 여기저기서 거센 반발이 터져 나오고 있다. ‘더 내고 덜 받는 데’ 좋아할 사람은 없지만 기묘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이렇다. 현 세대가 ‘덜 내고 더 받으려고’ 할 때 그 부담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기 때문이다.
강제성을 띤 국민연금은 출범 초기 가입자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구조를 갖고 태어났다. 이런 구조로는 2047년경에 기금이 바닥난다. 연금은 지급해야 하고 돈은 없다면 어디에서 가져오겠는가. 미래의 연금납부자나 국가 재정이다. 국가 재정이라는 게 국민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세금인 이상 어느 경우든 미래 세대 부담인 셈이다. 2050년 한해에만 약 407조원을 이들의 주머니에서 긁어내야 한다.
“현 세대들은 배를 곯아가며 피땀 흘려 한국경제를 일으켜 세웠다. 더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물론 자격은 충분하다. 그런데 한국 부모의 정체는 어느 쪽인지 궁금하다. 기러기아빠일까, 아니면 자녀에게 바닥난 연금을 메우라고 떠넘기는 사람일까.
천광암 논설위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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