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9·11 아이러니

  • 입력 2003년 9월 9일 16시 32분


11일 영국 런던 한복판에선 세계 무기 엑스포가 열린다. 세계 유수의 무기상인들이 고객들을 초청해 마련한 ‘국제 방위시스템 및 장비(DSEI)’ 행사다. 첨단무기를 사겠다고 모인 국가 중엔 미국과 관계가 냉랭해진 시리아가 있다. 결코 평화롭지 않은 콜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케냐도 빠지지 않는다. 이들에 가장 많은 무기를 파는 나라는 단연 미국이다. 영국이 그 다음이고. 이렇게 거래된 무기로 1990년대만 해도 400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중 90%가 군인 아닌 민간인이다. 공교롭게도 3000여명의 민간인이 테러에 희생된 9·11 2주년에 ‘무기 파티’가 열리는 데 대해 주최측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라고 했다고 영국 옵서버지가 전한다. 한쪽에선 무고한 희생자를 추모하는데 다른 쪽에선 무고한 희생자를 또 만들려 하다니 아이로니컬하다.

▷예상 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을 아이러니라고 할 때 9·11테러가 낳은 아이러니는 이뿐이 아니다. 2년 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테러를 뿌리 뽑겠다고 즉각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했지만 테러는 외려 확산됐다. 발리 리야드 나자프 등에서 억울하게 죽은 인명이 1000명이 넘는다. 오사마 빈 라덴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잡히지 않았는데 테러를 일삼는 또 다른 오사마 빈 라덴만 수없이 만든 셈이다.

▷둘째는 기름값이다. 석 달 전까지만 해도 영국 내각의 일원이었던 마이클 미처 전 환경장관은 “9·11은 미국이 세계 제패의 구실을 만들려고 의도적으로 방조한 테러”라면서 이라크전쟁도 미국과 영국의 석유 욕심 때문에 벌인 것이라고 폭로했다. 이 말이 맞다면 지금쯤 기름값은 내려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라크에선 석유관이 불타고 미국에서는 기름값이 자꾸 오른다고 아우성이니 별일이다.

▷결정적 아이러니는 9·11테러를 둘러싼 언어들이 그 본래의 뜻과는 반대로 쓰이게 됐다는 점이다. 테러 예방을 위해 만들어진 미국의 ‘애국법’은 시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세계인의 가슴에 출렁대는 ‘애국심’은 저마다의 국가와 민족을 위해 타국과 타민족에 위해를 가하는 걸 서슴지 않게 했다. 이슬람의 ‘성전’은 테러와 동의어로, 영국의 ‘진실부’는 정보조작부로, 미국의 이라크전 ‘종전’ 선언은 또 다른 전쟁의 시작으로 받아들여야 할 판이다. 거죽만 보고는 믿을 수 없다. 하긴 2년 전만 해도 평화와 인간애에 대한 갈구로 가득 찼던 미국이 맹렬한 일방주의를 거쳐 이젠 유엔과 다른 나라에 손을 벌리고 있으니, 앞으로 또 어떤 아이러니가 펼쳐질지 지켜볼 일이다.

김 순 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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