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더이상 잃어버릴 게 무어람
아무 것도 있고 아무 것도 없다
가진 것 다 버리고 집 떠나
고승이 되었다가
고승마저 버린 사람도 있느니
가을꽃 소슬히 땅에 떨어지는
쓸쓸한 사랑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른 봄 파릇한 새 옷
하루하루 황금옷으로 만들었다가
그조차도 훌훌 벗어버리고
초목들도 해탈을 하는
이 숭고한 가을날
잘 가거라, 나 떠나고
빈들에 선 너는
그대로 한 그루 고승이구나
-시집 '오라, 거짓사랑아'(민음사)중에서
사랑을 잃고 상심하여 가을 산에 드니 나 하나의 상실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나무들은 여름내 푸른 수의(囚衣) 물들여 황금 어의(御衣)를 걸쳤으나 그마저 미련 없이 떨구고, ‘고승이 되었다가 고승마저 버린 사람’ 앞에서 처연히 깨닫는다. 더 이상 잃어버릴 건 ‘아무 것도 있고 아무 것도 없구나’.
저 깨달음은 ‘잃었다 한들 본래 없던 것, 얻었다 한들 본래 있던 것’이란 불경의 한 구절을 연상시키나, 케케묵은 목판 경전에 의존하지 않고 가을 길에서 스스로 깨친 것이다. 시(詩)란 경전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경전을 만들어내는 일.
가을은 누구나 한 번쯤 선승이 되게 하는 계절이니 상수리나무는 찬바람에 도토리 한 줄금 떨굴수록 더욱더 눈매 깊어진다.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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