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최용건/히말라야에서 캐낸 행복

  • 입력 2003년 9월 19일 18시 37분


행복이란 무엇일까. 이제는 닳고 닳아 대중잡지 표지의 여배우 모습만큼이나 통속적으로 여겨지는 그 화두를 품고 나는 히말라야를 넘어 땅 설고 물 선 라다크까지 찾아왔다. 도인들이야 삶의 목표를 도(道)의 경지에 두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와 같은 범부는 그저 소박한 행복에 이르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생의 어느 한 순간만이라도 그 행복의 길을 한가로이 걸어보고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직장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그만두기도 했다. 그리고 도회를 떠나 오지로 들어가기도 했다. 행복한 삶이란 재화의 많고 적음이나 사회적인 지위의 고하와 관계없이 오로지 도덕적인 삶을 견지할 때에만 가능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니까 부도덕한 권력자나 부호의 불안스러운 삶보다는 자신의 무능을 골백번 시인해가며 마음 편히 살아가는 거지의 삶이 더 행복하리란 생각에서였다. 한편으론 그러한 삶들이 모여 부락을 이룬 ‘샹그릴라(이상향)’가 히말라야 너머 어디쯤엔가 있지 않을까 꿈을 꾸기도 했다.

라다크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90년대 중반 하이텔 통신의 ‘아시아문화 탐구’ 동호회 활동을 하던 때였다. 그 뒤 스웨덴 언어학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라는 책을 읽고 라다크인들의 삶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됐다.

하지만 라다크에 들어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나의 생각은 어쩌면 노르베리 호지가 선진 산업사회라면 어디서나 겪었을 과거 농경사회의 가치를 이상으로 여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라다크에 처음 발을 디뎠던 70년대의 가난하지만 행복하던 라다크인들의 삶에 매료된 ‘나이브’한 서정이 라다크 예찬을 넘어 ‘라다크 프로젝트’라는, 다소 현지인들의 바람이나 정서와는 유리된 사업을 전개시키고 있다는 생각이다.

더욱 아쉬운 것은, 그가 70년대식 라다크인들의 농경 위주의 삶을 이상으로 여기긴 했지만 정작 자신은 그것과는 무관하게 살아 왔다는 점이다.

개방 이래 라다크는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의 모습이 지난날 부도덕했던 우리들의 초상과 너무나 닮아 있다는 데서 나의 혼란은 시작된다. 내가 히말라야를 넘기 전 머릿속에 그렸던, 고도의 도덕성을 기반으로 한 순정한 삶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피부에 와 닿는 도덕성의 평균치는 우리 사회보다도 못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정작 라다크로부터 얻은 메시지는 그곳 사람들의 삶이 아니라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히말라야라고 하는 대자연의 모습이다.

라다크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인 장스카르 계곡에 얼마 전 8박9일간 트레킹을 다녀왔다. 파둠에서부터 해발 5090m의 싱고라를 넘어 다르차라는 곳까지 말과 도보를 이용해 이동하는 총연장 176km 코스다. 고개 정상 부근에서는 만년설을 밟기도 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만년설이 지척에 있어 춥고 바람이 거센 고산지대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들꽃들이 피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에델바이스는 물론 많은 이름 모를 꽃들이 있어 평생 갈증으로 살아온 화가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었다.

한편으론 기후와 토양이 척박한 곳에서 어떻게 저토록 아름다운 생명을 피울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는 들꽃 옆으로 다가가 최대한 자세를 낮추어 몸을 길게 뉘어 보았다. 뜻밖에도 바람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일조량도 좋아 몸이 몹시 따뜻해 왔다. 연약한 들꽃들이 이처럼 높은 히말라야 산상에서 아름답게 꽃 피울 수 있는 비밀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춥고 바람이 세찬 곳에서는 들꽃들이 키를 낮추듯, 혼탁한 세태에선 우리 모두 키를 낮추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만 우리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소중한 행복의 씨앗이 싹트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약력 ▼

1949년 생.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뒤 강원대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96년 부인과 함께 강원 인제군의 산간마을인 진동리에 정착해 살다가 올 3월 라다크로 떠났다. 에세이집 ‘흙에서 일구어낸 작은 행복’(열음사·1999년) 등을 펴냈다.

최용건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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