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진덕규/‘세대’의 환상

  • 입력 2003년 9월 21일 18시 25분


필자를 포함해 지금의 60대 중반은 ‘한글세대’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초등학교 1, 2학년 때 광복을 맞아 학교에서 최초로 한글을 배웠기 때문이다. 한글로 ‘화려한 금수강산’과 같은 국어책을 읽었고 “따스한 봄날 백제의 옛 서울 찾아드니…”와 같은 문장을 외웠다. 그러다가 대학생이 되어 4월 혁명을 주도한 후 우리는 ‘4·19 세대’가 되었다. 우리는 이승만-이기붕 독재체제를 무너뜨렸다는 흥분에 도취했고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했다는 자부심도 가졌다. 그때는 정말이지 기성세대가 그럴 수 없이 나약하게 여겨졌다.

▷4·19혁명 때만 해도 우리 세대는 하루아침에 멋진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부정부패를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정착시킬 유능한 지도자 반열에 올라설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통일도 당장 이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혁명 뒤에 이어진 혼란스러운 정치파쟁이 5·16 군사쿠데타의 빌미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했음에도 4·19 세대라는 환상에만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우리 사회에는 여러 ‘세대’가 뒤따랐다. ‘6·3 세대’를 비롯해 오늘의 ‘386 세대’에 이르기까지 정치변동의 고비 때마다 새 세대가 그럴듯한 구호를 내세우며 전면에 나섰다. 그렇게 해서 우리 4·19 세대는 어느 순간에 낡은 세대가 되어 버렸다. 책임 있는 일 한번 맡아보지도 못한 채, 그렇게 일선에서 멀어져 갔다. 물론 우리 뒤를 이은 세대들이 걸어간 길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대라는 말이 한낱 허황된 조어(造語)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새까맸던 우리 머리 위에 회색빛 세월이 겹겹으로 내려앉은 뒤였다.

▷세상일에는 연륜이란 나이테도 중요하고 급한 만큼 기다릴 줄 아는 지혜도 소중하다. 우리가 한창 ‘세대’의 마력에 휩쓸렸을 때는 당장 무언가를 이룩하고 싶다는 조급함이 너무 컸다. 무능하고 무기력한 기성세대 때문에 우리가 일할 기회를 잡을 수 없다는 불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의욕과 능력, 그리고 경륜이 손을 잡을 때 제대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러기에 세대는 소수의 그들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통칭한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야만 “나이 많은 것이 죄가 될 수 있다”는 철부지 같은 생각도 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지난날 세대 감정에 사로잡혀 세상을 잘못 바라본 전철을 후배들 세대는 밟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진덕규 객원논설위원·이화여대 교수 dkjin@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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