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김종삼, '漁夫'

  • 입력 2003년 9월 22일 18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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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미우에이의 바다와 老人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시선집 '북치는 소년'(민음사)중에서

여든네 번이나 허탕치고 돌아왔던 늙은 어부는 사자 꿈을 꾸고 나간 출어에서 생애 최고의 물고기를 만난다. 혼신의 사투를 벌인 노인이 마침내 대어를 뱃전에 묶고 돌아왔을 때, 막상 남은 것은 상어 떼에게 말끔히 살을 뜯긴 허연 뼈뿐이다. 그럼에도 상처투성이 노인은 중얼거린다. ‘인간은 죽음을 당할지는 모르지만 패배하지는 않는다’고.

풍랑에 찢긴 바다 저 멀리 통통배 한 척이 구겨진 수평선을 다리며 온다. 반듯한 水·平·線. 하나 바다에 나가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안다. 수평선이란 얼마나 허구인가를. 작은 물새 한 마리의 기척에도 흔들리는 수평선은 한시도 수평이 없는 채로 수평이다.

파문 없는 생(生)이 어디 있으랴. 조물주는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생명에게도 고래만 한 시름쯤은 가슴에 품을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다.

태풍 매미가 할퀴고 간 사람들에 비해, 또 다른 출어를 꿈꾸는 헤밍웨이의 노인은 차라리 사치스럽다. 그러나 아무리 큰 절망도 삶 속의 일인즉 저 시인의 시구에 잠시나마 위안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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