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골목 안. 사람들은 돗자리를 깔고 앉아 완두콩 껍질을 까거나 서로의 흰머리를 뽑는다. 대문 앞 계단참은 골목 사람들 공동의 의자. 한 계단씩 번갈아 앉아 간밤에 이웃집 큰소리 나며 싸운 이야기가 오고가는 사랑방이 된다.
골목 안은 골목을 공유한 사람들이 나누어 쓰는 생활공간이기도 하다. 목욕탕이 없는 집의 엄마는 커다란 고무대야를 골목에 내놓아 아이를 씻기고, 공부방이 없는 아이는 골목길에 상을 펴서 숙제를 한다. 부업으로 생밤을 까는 엄마들에게는 골목이 공동작업장이고, 놀이터가 없는 아이들에게는 좁고 가파른 비탈조차 신나는 놀이공간이다. 골목은 거기 깃들이는 사람들과 더불어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표정이 되었다.
1968년부터 2001년까지 서울 중림동, 도화동, 아현동, 만리동, 공덕동, 행촌동의 골목 안을 찍어온 작가(65)의 여섯 번째 골목사진집.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의미의 선집(選集)이기도 한 이번 작품집에는 30여년 촬영분 중 뽑은 160여점의 흑백과 컬러 사진이 담겼다.
동료 사진작가 한정식씨(대구예술대 석좌교수)가 지적했듯이 작가는 “골목을 통로가 아니라 그 골목 사람들의 안방에서 마당을 거쳐 이어진 생활공간”으로 보았다. 책 제목 중 ‘안’은 그래서 중요한 개념이다.
작가가 30여년간 찍어온 골목 풍경은 60년대 이후 서울의 형성사를 도시사회학이나 인류학 이론이 아닌 사진으로 증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농촌을 떠나 도시 변두리에 살게 된 사람들은 골목 안에서 만난 이웃을 통해 일자리를 찾았을 것이고, 높은 은행 문턱을 넘는 대신 급한 돈을 마련했을 것이며, 고향마을 당산나무 아래 쉼터에서와 같은 마음의 위안을 느꼈을 것이다. 골목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자생적으로 만든 상호부조의 장이자, ‘공동체’의 물리적 존재공간이었다.
그 자신 서울 사직동 골목을 뛰어다니며 자란 작가는 처음 카메라를 메고 중림동 골목에 들어서던 날 “그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어린 시절을 연상하며, 내 평생의 테마는 이것이라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즐겨 찍던 골목과 사람들은 하나둘 재개발과 세월에 밀려 사라져갔고 마침내 97년 주 촬영지인 중림동에도 아파트가 들어섰다.
‘골목은 내 평생 테마라고 했는데 내 평생보다 골목이 먼저 끝났으니 이제 골목 안 풍경도 끝내지 않을 수 없다.’
골목 사진들은 사라져가는 것들의 박제된 기억이 아니다. 언젠가 삭막해져 가는 도시의 거주공간을 어떻게 상호소통의 장으로 만들 것인가를 두고 구구한 이론이 머리를 쳐들 때, 이 사진 속에 담긴 골목 풍경과 골목 안 사람들의 환한 얼굴은 ‘우리 안에 있었던 대안’으로 재조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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