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낭만적 사랑과 사회'…여인의 생존전략은 기만술

  • 입력 2003년 9월 26일 17시 39분


소설가 정이현.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발칙한 도발’을 일삼는다. 사진제공 문학과지성사
소설가 정이현.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발칙한 도발’을 일삼는다. 사진제공 문학과지성사
◇낭만적 사랑과 사회/정이현 지음/251쪽 8000원 문학과지성사

‘여우 같은 것들!’

최근 한 속옷광고 카피는 이렇게 외친다.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속내를 내보이지 않는 것은, 즉 기만술은 여인들의 생존전략으로 그 이력이 길다.

지난해 문학과지성사가 제정한 ‘제1회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 수상작가의 첫 창작집인 이 책은 속내를 감춘 ‘여우 같은 것들’로 가득하다. 주인공들은 부모를 상대로 자작 납치극을 꾸미거나(‘소녀 시대’), 하루에도 감쪽같이 여러 애인 품을 옮겨다니거나(‘낭만적 사랑과 사회’), 내연의 남자를 죽이고 천연덕스럽게 일상을 이어간다(‘트렁크’). 여인들은 연인과 관계를 갖고서, 사람의 머리를 내리치고서 화장을 고친다.

‘순수 편 주인공의 말처럼 ‘약하고 만만해 보이는 순간, 정글의 먹잇감이 되고 만다는 걸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안다’는 것 때문일까. 정교한 제도로 얽힌 현대사회가 더 이상 정글은 아니지만 여전히 ‘본능’은 유효하다. 사회적 투쟁이 제도화되고 지능화될수록 사자보다는 여우들의 활동공간이 늘어난다. 사냥이 거래로 대체된 세상에서 ‘위장’은 환금성(換金性)을 높이는 고도의 수단이 된다. 그들에게 화장은 위장의 일부이자 무장(武裝)이다.

표제작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 속옷이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것은 일종의 역설이다. 줄기차게 입어온 끝에 노랗게 변색된 팬티. 뭇 남성이 소망하는 최후 단계의 육체적 접촉에 응하지 않기 위해 주인공은 일부러 차마 남성 눈앞에 노출할 수 없는 속옷을 입는다.

인생은 즐기되 베팅은 확실해야 한다고 믿는 주인공에게 육체의 순결은 유일하게 기만이 불가능한 지표다(신랑 후보자 중에는 수많은 ‘전문의’가 있다). 수많은 위장 속에서 단 하나 순결 이데올로기와 위장하지 않는 영합을 통해 주인공은 자신의 값을 높이려 한다. 허무하게도 공들여 ‘베팅’한 남자 앞에서 혈흔이 나오지 않는 바람에 주인공의 전략은 위기를 맞는다.

낯설게 들리는 표제작의 제목이 ‘낭만적 사랑이란 사회적으로 고안된 개념’임을 주장한, 재클린 살스비의 동명의 책에서 나왔다는 것은 인터넷 도서검색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의 제목들, ‘소녀시대, 순수, 무궁화, 홈드라마, 신식 키친…’을 차례로 들여다보면, 제도화된 여성성을 암시하는 이 개념들이 차례로 주인공들에 의해 이용된 뒤 야유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의 표제에 이용된 ‘낭만적 사랑’은 바로 그 이용과 야유의 정점에 놓인다.

작가가 꿈꾸는 것은 무엇일까. ‘낭만적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의 공고함에 구멍을 내고자 하는 것일까, 또는 이 이념에 영합하고 기생해 온 여우들의 전략까지를 싸잡아 공격하고자 하는 걸까. 열쇠는 작가의 시선이 주인공들과 얼마나 거리를 두고 있는가에 달렸을 듯하다. 그 거리를 재기가 녹록하지 않다. 때로 직설과 반어(反語)를 가리기 힘든 당돌한 화법과 함께, 그 ‘거리 유지하기’가 이 작가의 실제 매력을 만들어내는지도 모른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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