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많은 책을 쓴 사람은 누구일까. 이황? 아니면 정약용? 아니다. 적어도 최남선의 말에 따르면 이황도 아니고 정약용도 아니다.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속편)’에서 우리나라의 최대 저술로 최한기(崔漢綺·1803∼1877)의 ‘명남루집’ 1000권을 꼽았다. 1권의 두께가 오늘날과 다르고 그 숫자가 다소 과장이 됐으리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한 사람의 저술이 1000권이나 된다는 것은 전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좋은 책이 있으면 값을 마다하지 않고 사서 읽었다는 최한기의 책읽기도 전설적이다. 책값 때문에 적지 않았던 재산을 탕진하고는 도성 밖에서 셋방살이를 했다거나, 책을 구하기가 편리하다는 이유로 낙향의 권유를 뿌리치고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그가 얼마나 책을 사랑했는지를 말해준다. 그의 방대한 저술 뒤에는 책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 있었다.
최남선은 그의 저술에 대해 “대부분 간행되지 않아 원본조차 사방에 흩어져 장차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 있음은 진실로 딱한 일입니다”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정작 딱한 것은 책이 아니라 그 책을 쓴 사람이고 그 사상이다. 칸트는 알아도 최한기는 모르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캉유웨이(康有爲)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이름은 대충이나마 알고 있지만, 최한기의 이름은 왠지 낯설다. 지난 100여년 동안 근대화, 아니 서구화의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그를 잊고 지냈다. 지독한 식민지성!
최한기의 사상을 다룬 이 책은 저자 박희병 교수(서울대 국문학과)의 말처럼 특별한 형식 없이 자유롭게 생각을 펼쳐 나가는 방식으로 씌어졌다. 그래서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최한기 사상에 대한 종전의 연구는 주로 그 근대적 성격을 규명하는 데 주안점이 두어져 왔다”로 시작되는 이 책의 문제의식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근대 확인적 관점’으로는 최한기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통렬한 비판에서부터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가 그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이른바 ‘근대 성찰적 관점’이다. 이 관점은 역사적 근대를 직시하면서도 그 문제점을 동시에 읽고자 하며, 더 나아가 역사적 근대와는 다른 근대기획의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점에서 근대 확인적 관점과 구별된다. 최한기의 재발견이 ‘근대의 극복’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저자의 기대가 이 책에서 얼마나 충족되었는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최한기의 사상에서 오늘날 우리가 고민하는 문제들, 이를테면 서양을 보는 눈의 문제, 주체성의 문제, 세계화의 문제,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 등을 읽어내고자 하는 저자의 문제의식만큼은 높게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100여년 전 ‘자생적인 근대화’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최한기가 걸었던 외롭고 고된 사색과 실천의 길은 우리의 소중한 지적 자산이다. 이 책이 그 소중한 지적 자산들을 되살리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김용헌 한양대 교수·한국철학 yong@hanyang.ac.kr
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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