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형찬/신중함 잃은 '세계적 석학'

  • 입력 2003년 10월 1일 18시 17분


송두율 독일 뮌스터대 교수의 스승인 위르겐 하버마스 독일 프랑크푸르트대 명예교수가 송 교수에 대한 한국 수사기관의 조사 소식에 분노하며 “그런 야만국가에서 당장 나오라”고 했다고 한다.(9월 30일 송 교수의 변호인 김형태 변호사)

독일의 세계적 사상가인 하버마스 교수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통해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자유로운 논의가 가능한 공론영역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주창해 왔다. 그에 따르면 의사소통의 합리성은 기득권을 상징하는 돈, 권력 등과 맞서면서 토론의 공간을 넓혀 나간다. 하버마스 교수는 이에 더해 사회적 소수자 등 토론과정에서 배제되기 쉬운 사람들의 관점에서도 비판이 가능하도록 의사소통의 장을 열어둬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그런 그로서는 독일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던 제자가 37년 만에 돌아간 고국에서 수사기관에 불려 다니며 조사를 받는 일에 화가 날 만도 하다. 하지만 그는 한 부분만 보고 큰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버마스 교수는 그간 매우 신중한 학자로 알려져 왔다. 그는 모든 사회가 지향해야 할 보편이론을 추구하지만 구체적 현실 문제에 대해서는 그 사회의 특수성을 먼저 고려할 것을 강조해 왔다.

일례로 그가 1996년에 내한했을 때 ‘그의 이론이 한국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자 “한국은 역사적 경험이나 현실에서 서구와 다르므로 이상적 모델을 굳이 서구에서 찾을 필요는 없다”고 대답했다. 독일통일의 교훈을 한반도에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독일의 경험을 너무 성급하게 한국에 확대 적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그런 그가 세계 최악의 인권국가, 자신이 지향해 온 ‘공론영역’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북한 정권에 송 교수가 동조해 왔다는 사실은 무시하고 합법적 수사절차를 밟고 있는 대한민국을 ‘야만국가’라고 비난한 것은 그동안 보여 줬던 그의 신중함과는 사뭇 다른 행동이다.

현재 송 교수는 국가정보원 조사과정에서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됐을 뿐 아니라 북한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를 지지하던 진보적 인사들조차 송 교수가 자신의 행적을 숨겨 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당혹스러워 하는 분위기다.

하버마스 교수의 발언을 제자를 아끼는 마음이 앞선 스승의 사적(私的) 소회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계적 사상가로 평가받는 그의 말과 행동은 이미 공적(公的) 영역에서 영향력 있는 지식권력으로 행사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의 발언이 한국정부의 합법적 수사절차를 비난하고 송 교수의 행적을 옹호하는 데 이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형찬 문화부·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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