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활/또 정치가 경제를 망치는가

  • 입력 2003년 10월 19일 18시 16분


6년 전 이맘때 한국은 외환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30년 이상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성장 신화(神話)’는 무너졌다.

위기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우선 대기업의 방만한 차입 경영과 무분별한 신규사업 진출을 들 수 있다. 경상수지 적자가 이어지는데도 “펀더멘털이 튼튼하다”고 큰소리쳤던 정부의 안이한 상황 인식은 기름을 부었다. 나라가 쪽박을 차든 말든 ‘제 몫 챙기기’에 골몰한 노동계, 외환보유액을 원화가치 방어에 부질없이 탕진하는 데 한몫 거든 언론도 책임을 면키 어렵다.

하지만 만약 1997년이 대통령선거의 해만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좀 더 현명하게 대처하고 고통의 크기를 줄일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한보 및 기아자동차사태 등 위기를 알리는 신호는 이미 있었다. 그해 여름 태국의 통화위기 직후만이라도 정신을 차렸다면 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벌리는 지경까지는 안 갔을 수 있다.

그러나 여야 정치권은 대선에만 관심이 있었고 경제는 뒷전이었다. ‘주인 없는 회사’의 온갖 문제점이 집약된 기아차를 ‘국민기업’ 운운하며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부추겼다. 경제 및 노동 관련 법안은 국익은 뒷전이고 선거에서의 유불리(有不利)만으로 판단했다.

일본의 한국경제 전문가인 후카가와 유키코(深川由紀子) 현 도쿄대 교수는 97년 11월 도쿄특파원이었던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동남아 통화위기는 외국인투자자들이 갑자기 핫머니를 빼내 발생한 반면 한국은 실물경제의 부진이 원초적 발단이었다. 또 경제가 나빠지는데도 정계 관료 금융계 노동계가 밥그릇 싸움에만 골몰한 것도 문제였다. 동남아처럼 외부에 책임을 돌릴 수 없고 스스로 초래한 자멸의 성격이 짙다.”

2000년 4·13 총선을 전후해 정치는 다시 한번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정부 여당은 ‘성공적 IMF 졸업’을 자랑하며 앞장서 샴페인을 터뜨렸다. 선거에 부담이 되는 정책은 ‘올 스톱’됐다. 부동산경기 띄우기처럼 우선 달콤하지만 나중에 반드시 ‘청구서’가 따르는 정책이 줄을 이었다. ‘기업 개혁’을 주장하던 정권 실세들은 천문학적 뒷돈을 챙겼다.

이제 눈을 현실로 돌려보자. 안타깝게도 우리 정치인들은 ‘실패의 경험’에서 별로 배우지 못한 것 같다.

많은 국민이 지금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릴 때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가. 집권 1년도 안 된 대통령을 두고 ‘손절매(損切賣) 고민’까지 해야 하는 현주소는 정말 착잡하다. 대통령 측근들이 보여 온 행태도 과거와 별로 다르지 않다.

정치권 역시 그렇다. 여야의 관심은 내년 4월 총선에만 쏠려 있다. 국회의 경제 관련 상임위원회는 정치적 이유로 겉돌기 일쑤다.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및 2차 추가경정예산 심의, 각종 민생법안 처리 등 산적한 국정 현안이 표류하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올해 실질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6%로 낮추었다. 지난해 말 내놓은 5.3%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작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이 596조여원인 점을 감안하면 16조원 이상의 국부(國富)가 허공에 날아간 셈이다. 복리(複利)효과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70의 법칙’에 따르면 연평균 7% 성장하는 경제가 소득 두 배가 되는 데는 10년 걸리지만, 2% 성장하는 경제는 35년이나 걸린다는 점도 잊지 말자.

대통령과 여야 정치인, 경제관료들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당신들의 말과 행동이 경제에 미칠 영향을 한 번 더 생각하라. 최소한 정치와 정책이 다시 경제를 망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어찌 될 것인가. 모두 함께 빠져서 죽지 않을까?’ 시경(詩經)에 나오는 이런 탄식이 기우(杞憂)에 그치면 좋으련만….

권순활 경제부차장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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