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임성학/고백하고 용서받아라

  • 입력 2003년 10월 23일 18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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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최돈웅 의원이 SK로부터 100억원을 받았다고 시인하고, 한나라당측이 이 돈을 지난해 대선자금으로 썼다고 인정함에 따라 정국은 또다시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측근 비리 혐의에 따른 도덕성의 실추로 재신임 투표라는 일종의 ‘정치적 파산’을 스스로 선고한 지 2주일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국회를 장악하고 있는 거대 야당의 도덕성도 불법정치자금 문제로 추락하게 됐다. 국민은 이제 누구를 믿고 의지해야 할지 정말 난감하다.

▼정치자금 ‘불법 악순환’ 끊을 계기 ▼

SK비자금 문제는 두 가지 점에서 한국 정치자금의 불법성과 후진성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대기업과 정치권 사이에 검은돈의 뒷거래를 통한 정경유착이 여전히 만연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나라당이 받은 100억원이 단순히 정당 발전을 위한 후원금의 성격으로 제공됐다고 볼 국민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 정치자금에 대한 정치인과 정당의 인식 및 대응방식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재확인됐다. 정치자금사건이 터질 때마다 당사자들은 으레 “한 푼도 받지 않았다”고 잡아뗀다. 그러다가 혐의에 대한 증거가 제시되면 “돈은 받았지만 불법적 정치자금은 받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더 큰 진실’을 폭로할 의도를 비쳐 상대 정당 또는 정치권 전체를 협박하기도 하고, 다른 정당과 정치인도 불법정치자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공범론’, 즉 ‘물귀신작전’을 통해 사태를 희석시킨다. 마지막으로 표적수사 혹은 야당탄압이라는 정치공세와 정치자금 현실화의 필요성을 제기해 국민적 동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정치자금법 위반에 대한 면죄부를 받으려 한다. 이런 책임회피 행태가 정치에 대한 국민의 환멸을 더욱 심화시킨다.

SK비자금 문제를 이 같은 불법정치자금 문제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 정치권이 정치자금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정치 발전을 꾀하기보다 국정주도권 장악이나 선거에 이용할 정략적 이슈로 부각시키려 하면 정치개혁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정치권은 SK비자금 문제가 어느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정치권 전체의 총체적 위기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노 대통령은 7월 민주당의 지난해 대선자금 문제가 불거졌을 때 ‘불법자금 수수는 없었다’는 취지로 말했다. 하지만 이번 검찰 수사를 통해 이상수 의원이 SK로부터 받았다는 25억원 중 10억원은 SK의 정치자금 기부 한도를 넘는 것이어서 개인명의로 처리해 탈법 수수한 사실이 드러났다. 또 최도술 전 대통령총무비서관도 대선 직후 SK측으로부터 11억원을 받아 이중 3억9000만원을 대선자금 빚 청산에 쓴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 여야 모두 SK비자금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극복하고 불법정치자금 수수와 부패의 재발을 막음으로써 청정정치를 실현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물론 불법정치자금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없다. 하지만 선결돼야 할 과제는 있다. 무엇보다 정치자금의 투명성 확보가 시급하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여야 모두가 대선자금과 정치자금을 낱낱이 공개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

▼특검 통해 공개검증 받을수도 ▼

7월 민주당 대선자금 논란 때 여야는 자금기부자의 명단 공개는 정치자금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한 바 있다. 그러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1일 기부자의 실명공개가 정치자금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법적 제약도 없어진 것이다.

대선자금 정치자금을 공개할 경우 정치자금법 위반 사항이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고, 기부자가 자신의 신원 공개를 꺼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적 불신을 불식하고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선자금 공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공개 내용에 대한 검증은 특별검사 등을 통해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이 담보된다면 법 위반이 있어도 국민이 일정 부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치자금법 위반을 양심고백해 기소된 김근태 의원에 대한 처리방식이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임성학 중앙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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