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80년대 경제개혁과 김재익 수석'

  • 입력 2003년 10월 24일 17시 37분


생전의 김재익 수석 부부. 동아일보 자료사진
생전의 김재익 수석 부부. 동아일보 자료사진
◇80년대 경제개혁과 김재익 수석/남덕우 강경식 사공일 등 8명 지음/250쪽 1만2000원 삼성경제연구소

정부 주도의 한국 경제가 민간 주도의 시장경제 체제로 방향 전환을 이룬 것은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이었다. 그 경제 개혁의 선봉에는 미국의 신고전파 경제학의 세례를 받은 시장경제 신봉자 김재익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이 있었다.

이 책은 1983년 10월 미얀마 아웅산 국립묘지 폭탄테러 사건으로 45세의 나이에 순직한 김 수석의 20주기 추모 기념집이다. 한 인물에 대한 기억이되 한국 경제의 중요한 분수령이 생성된 지점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한국은행에 다니던 김 수석은 1974년 남덕우 경제기획원 장관의 비서실장으로 공직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당시는 경제 관료나 국민 대다수가 수출과 고도성장만이 한국 경제가 살 길이라고 여길 때였다. 그러나 김 수석은 “수출보다 수입을 해야 한다” “성장보다는 안정이다”며 용기 있게 다른 목소리를 냈다.

김 수석은 전 대통령 정부에 합류한 후에도 예산 동결, 미곡 수매가 동결, 통화긴축, 수입 자유화 등 ‘인기 없는’ 경제 정책을 일관되게 수행했다. 또 전자 정보통신 산업의 성장 잠재력을 간파하고 오명 박사를 전자 정보통신 산업담당 경제비서관으로 발탁해 전자산업 육성방안을 내놓는 등 정보기술(IT) 강국의 초석을 닦았다. 이미 1980년대 초 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것을 예상하고 홍콩에서 이탈하는 자본과 고급 인력 등을 한국으로 유도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며 ‘동북아 경제 중심지’를 역설하기도 했다.

경제 관료로서 김 수석의 성공 비결에 대해 저자들은 여러 가지를 꼽는다. 우선 행정고시를 거치지 않은 비정통 관료였기 때문에 자유롭고 소신 있게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는 것.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감각도 탁월했다. 그는 1974년 제1차 석유파동으로 물가가 급등했을 때 수입자유화 정책을 들고 나왔다. 1979년 12·12사태로 한국 경제가 위태로워졌을 때는 외국인 투자 장려 정책을 내놓았다. 1982년 이철희 장영자 거액 어음 사기사건으로 금융 대혼란이 벌어진 상황에서는 은행 민영화와 금융실명제를 추진했다.

무엇보다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라며 끝까지 힘을 실어준 전 대통령의 지원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지식인 친구들은 “김재익은 김일성 밑에 가서도 일할 사람”이라고 비난했지만 김 수석은 이렇게 응수했다.

“만약 내가 김일성을 설득해 그 사람의 생각을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그렇게 해야지.”

이코노미스트 김재익은 독재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경제 철학을 실현한 운 좋은 사람이었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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