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일선 기자생활을 마치고 동아일보 출판국장으로 재직중이던 민병욱 기자에게 박수룡 화백이 찾아왔다. 박 화백은 ‘마치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처럼’ 말을 꺼냈다.
“사람들이 다 떠나요. 이름도 낯선 몰디브나 피지로 몰려가고, 태국 중국은 이웃집 마실 가듯이 다녀와요. 진짜 좋은 건 바로 우리 곁에 있는데….”
그렇게 해서 월간 ‘신동아’에 연재된 ‘화필기행-붓따라 길따라’가 시작됐다. 민 기자의 글과 박 화백의 그림으로 우리 산하 곳곳의 절경을 집어낸다는 기획이었다.
‘박 화백의 순수한, 어찌 보면 아이같은 애국심이 그 자신은 물론 나까지 대한민국의 산과 강, 들과 바다를 헤집고 다니게 만들었다’고 글쓴이는 고백한다. 20개월동안, 주말과 공휴일을 이용해 한 달에 2, 3일씩 전국을 누볐다.
전해 듣는 풍경이 실제 눈으로 대하는 풍경보다 화려할 때가 있다. 범인(凡人)의 시선에 잡히지 않는 장엄함이 화가의 붓끝을 빌려 비로소 전해져올 때가 있다. 일선기자 시절 문명(文名)을 날렸던 글쓴이의 감칠맛 나는 글솜씨와, 숨쉬는 듯한 색감과 조형미로 찬사를 받아온 화백의 절묘한 붓끝이 어우러진다.
두 사람의 호흡은 때로 고수 명창의 신명나는 소리판처럼 절묘하다. 경남 밀양의 만어산(萬魚山).
‘가도가도 끝이 없을 것 같던 숲이 어느 순간 뚝 끊기더니 크고 작은 물고기 형태의 검은 돌밭이 한 눈에 가득히 들어왔다… 수천 수만개의 돌이 하나같이 머리를 바짝 쳐들었다. 산 위에서 울리는 소리를 귀담아들으려는 모양 같기도 하고, 숨이 막혀 너덜겅에서 빠져나와 하늘로 치솟으려 발버둥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라고 글쓴이는 묘사한다. 화백은 거칫거칫하면서도 우뚝우뚝한 흑과 백, 녹색의 조화를 화면 가득히 펼쳐놓으며 화답한다.
때로는 현실의 비경(秘境)이 방문자를 압도한다. 경북 영덕, 청송을 지나 재를 넘자 화려한 분홍 복사꽃밭이 끝없이 이어진다. 두 사람은 한숨을 쉰다. “이런 정경은 글로 도저히 표현 못해. 화백께서 그림으로 승부하셔야지.” 화백은 “아이고…이번엔 비구상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라며 손사래를 친다. 발걸음 하나하나까지 발그레 물들일 듯 한 복사꽃의 화사한 색감이 화면에 수놓아진다.
인간을 등지고 돌아앉은 심심산골만이 기행의 목적지는 아니다. 분단의 최전선, 경기 파주 비무장지대 마을에선 운동장만한 깃발들의 서글픈 펄럭임에 목이 메고, 대한제국말 1000여 의병들의 순절지인 홍주성에서는 후손들의 나태함을 통탄하기도 한다. 서울 영등포의 선유도에서 ‘앨카트라스 요새’를 연상하는 도시인의 여유도 잊지 않는다.
한편 연재를 마친 뒤 간경화로 쓰러졌던 박 화백은 최근 간 이식수술을 받고 회복 중. 글쓴이는 “몸이 상하는 것도 모르며 그림에 혼신을 쏟아부은 그가 자랑스럽다. 병을 이기고 다시 떨쳐 일어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말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