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장석남, '속삭임'

  • 입력 2003년 10월 28일 18시 20분


솔방울 떨어져 구르는 소리.

가만 멈추는 소리.

담 모퉁이 돌아가며 바람들 내쫓는

가랑잎 소리.

새벽달 깨치며 샘에서

숫물 긷는 소리.

풋감이 떨어져 잠든 도야지를 깨우듯

내 발등을 서늘히 만지고 가는

먼,

먼,머언,

속삭임들.

도심의 경적 소리에 오그라들고, 환풍기 소리에 우그러들고, 고함 소리에 쪼그라든 귓바퀴 하나 굴러간다. 가는 곳마다 시끌벅적, 우당탕탕, 왁자지껄, 쨍그랑 깽이로구나. 큰 소리가 더 큰 소리 속으로 묻히는 소리의 강에 고무신 같은 귀 한 켤레 떠내려간다. 차라리 귀 먼 채 낚싯대 하나 드리우고 싶건만 저 ‘속삭임’을 듣는 이 누구인가? ‘소리 호사(豪奢)’도 유만부동(類萬不同)?

침묵에서 꺼낸 게 소리라면 최초의 소리는 속삭임이 아니겠는가? 소리의 바탕이 고요라면 모든 소리는 속삭임이라야 하지 않을까? 연인(戀人)을 이끌던 것도 속삭임이며, 정적(政敵)을 당길 수 있는 것도 속삭임이 아니던가.

귀 아주 멀기 전에 잃어버린 속삭임을 찾으러 가야겠다. 댑싸리에 구름 쓸리는 소리, 보름달에 기러기 깃털 스치는 소리, 은하수에 투망 던지는 소리. 내 귓속에 사는 달팽이가 살아나 사각사각 적막을 갉아먹는 소리.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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