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학에서 사과문을 통칭하는 장르를 ‘어폴로지아(Apologia)’라고 한다. 원조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다.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무지에 대한 지(知)’야말로 신이 자신에게 내린 선물이라는 유명한 변론을 하고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 뒤를 이어 리처드 닉슨, 에드워드 케네디 등 크고 작은 인물들이 여론 법정에서 궁지에 몰릴 때 다양한 논리로 자신들의 처지를 변명했다. 서양의 사과문은 여론의 공격을 받은 공인의 중요한 방어 수단이었지만 아무리 논리가 단단하고 문체가 유려해도 형사처벌을 면케 해주지는 못했다.
▷풍성한 전통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어폴로지아는 점차 줄어드는 추세이다. 무엇보다 각종 법과 제도가 발달하면서 그들에게 구차한 변명의 여지를 남겨 놓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여기 가세한 것이 ‘공중관계학(PR)’이라는 홍보전문가들의 활약이다. 이들은 공인과 공중 사이를 매끄럽게 오가며 여론 법정이 설 낌새가 보이면 미리 조치를 취해 사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가히 사과의 전성시대를 구가하는 듯하다. 속 깊게 잘못된 우리 정치풍토, 허술한 법제도,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아주던 온정주의가 사과 만연의 사회를 이끌고 있다. 자기 잘못을 남에게 덮어씌우는 사람보다는 정중히 사과할 줄 아는 사람들이 양심적이다. 그러나 애초에 사과할 일을 하지 않은 사람보다는 못하다. 법과 제도가 사과할 상황을 미연에 방지해 준다면 더욱 좋을 일이다.
▷이래 저래 힘든 것은 그 모든 변명들을 들어 주어야 하는 국민이다. 사과의 인플레이션은 국민의 내성(耐性)도 함께 키운다. 이제 국민은 믿지 않는다. 사과가 무슨 소용이랴. 마음을 비운 듯 백담사로 떠나며 눈시울을 붉힌 한 전직 대통령이 숨겨둔 돈뭉치가 15년이 지난 지금 나라 안팎에서 발견되는 마당에….
박성희 객원논설위원·이화여대 교수·언론학 shpark1@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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