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박성희/어폴로지아 (Apologia)

  • 입력 2003년 11월 2일 18시 21분


어폴로지아 (Apologia)현직 대통령의 사과에 우리 국민은 익숙하다. 전직 대통령의 절절한 사과도 받아본 경험이 있다. 최근에는 정계를 은퇴한 전 대통령 후보까지 사과했다. 정부 관리도, 재계도, 언론도, 대학총장도 봇물처럼 밀려드는 사죄요구 앞에서는 물에 젖은 종잇장처럼 무기력하다. 우리 사회에서 공적(公的) 사과는 이렇게 나날이 외연이 넓어져 가고 시효는 점점 길어지는 느낌이다. 요즘 신문에는 온통 사과한 사람과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 사과해야 마땅한 사람과 발뺌하고 버티는 사람들 일색이다. 뉴스 메이커가 아니라 ‘사과 메이커’들이 판치는 세상이다.

▷수사학에서 사과문을 통칭하는 장르를 ‘어폴로지아(Apologia)’라고 한다. 원조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다.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무지에 대한 지(知)’야말로 신이 자신에게 내린 선물이라는 유명한 변론을 하고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 뒤를 이어 리처드 닉슨, 에드워드 케네디 등 크고 작은 인물들이 여론 법정에서 궁지에 몰릴 때 다양한 논리로 자신들의 처지를 변명했다. 서양의 사과문은 여론의 공격을 받은 공인의 중요한 방어 수단이었지만 아무리 논리가 단단하고 문체가 유려해도 형사처벌을 면케 해주지는 못했다.

▷풍성한 전통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어폴로지아는 점차 줄어드는 추세이다. 무엇보다 각종 법과 제도가 발달하면서 그들에게 구차한 변명의 여지를 남겨 놓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여기 가세한 것이 ‘공중관계학(PR)’이라는 홍보전문가들의 활약이다. 이들은 공인과 공중 사이를 매끄럽게 오가며 여론 법정이 설 낌새가 보이면 미리 조치를 취해 사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가히 사과의 전성시대를 구가하는 듯하다. 속 깊게 잘못된 우리 정치풍토, 허술한 법제도,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아주던 온정주의가 사과 만연의 사회를 이끌고 있다. 자기 잘못을 남에게 덮어씌우는 사람보다는 정중히 사과할 줄 아는 사람들이 양심적이다. 그러나 애초에 사과할 일을 하지 않은 사람보다는 못하다. 법과 제도가 사과할 상황을 미연에 방지해 준다면 더욱 좋을 일이다.

▷이래 저래 힘든 것은 그 모든 변명들을 들어 주어야 하는 국민이다. 사과의 인플레이션은 국민의 내성(耐性)도 함께 키운다. 이제 국민은 믿지 않는다. 사과가 무슨 소용이랴. 마음을 비운 듯 백담사로 떠나며 눈시울을 붉힌 한 전직 대통령이 숨겨둔 돈뭉치가 15년이 지난 지금 나라 안팎에서 발견되는 마당에….

박성희 객원논설위원·이화여대 교수·언론학 shpark1@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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