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다발로 곳곳에서 터지는 양상이 그렇고, 광범위한 지역으로 번져 나가는 모습도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인 최도술씨가 기업 돈 11억원을 받아 챙긴 사건에서 촉발된 불법 정치자금 문제는 야당인 한나라당으로 비화됐고, 민주당을 거쳐 다시 노 대통령 대선 캠프까지 수사선상에 오르고 있다.
재계는 “제도 개선이 되지 않으면 후원금을 낼 수 없다”며 개혁을 촉구하고 나섰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도 제도 개선 의지를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의 구호는 우선 ‘급한 불’을 끄고 보자는 심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제도 개선은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정경유착이라는 고질적 부패가 ‘제도’만으로 ‘청산’되지 않는다는 것은 외국의 수많은 사례가 증명한다.
일본에서는 76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당시 총리가 미국 록히드사의 뇌물을 받았다가 사임한 사건이 있었다. 정치권은 선거법과 정치자금법 등을 개정하며 개혁 의지를 표명했다. 하지만 10여년 뒤 여야 정치인들이 다시 취업정보지 리크루트사의 돈과 미공개 주식을 받아 챙긴 스캔들이 터졌다. 제도 보완에도 불구하고 부패 사슬은 끊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오일쇼크 직후인 74년 정부의 석유가격 통제와 석유비축정책을 저지하려는 정유회사의 로비스캔들이 터졌다. 역시 제도를 개혁했지만 20여년 뒤 또다시 부패 사슬이 드러나 대대적인 정풍 운동이 벌어졌다.
제도를 바꿔 개혁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당장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더구나 현재 한국 정치권은 개혁 의지 자체를 의심받는 처지이다. 예컨대 초대형 정치자금 사건이 터진 와중에도 음성적으로 자금을 모으는 정치인들이 있다. 한 40대 중견 기업인은 최근 필자에게 “여전히 이곳저곳에서 손을 벌린다”고 하소연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당은 당이고 나는 나”라며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이래서는 정치권이 아무리 자기 반성문을 써도 신뢰를 받을 수 없다.
우리 헌정사에도 돈 정치 근절을 위한 정치개혁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92년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엔 ‘정권 초기의 연례행사’라고 할 정도로 돈 정치 개혁을 위한 입법이 이뤄졌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집권자나 정치인들의 ‘의지’가 뒤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국민의 눈을 잠시 현혹하기 위한 개혁 구호였는지도 모른다. 96년 15대 총선이 끝난 직후인 4월 18일 YS는 이렇게 말했다.
“검찰에 여야를 막론하고 철저히 조사토록 지시했다. 상당수 당선자가 의원직을 잃게 될 가능성이 있다.” 당시 정가에서는 김 대통령이 “의원 100명을 구속해 선거를 다시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만큼은 돈 선거를 뿌리 뽑겠다”며 ‘혁명적 의지’를 가다듬고 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역시 그뿐이었다.
올해의 상황은 검찰이 주도적으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사례와는 양상이 다소 다르다. 하지만 검찰의 수사 의지 역시 정치권의 자정 의지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사상누각일 뿐이다.
열흘 이상 계속되면서 서울 면적의 5배 이상을 잿더미로 만든 캘리포니아 산불은 주말에 내린 가랑비로 겨우 불길이 잡혔다. 한국의 정경유착 고리를 끊어줄 가랑비는 없는 것일까.
최수묵 국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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