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지금의 정치자금 문제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사람을 아무리 많이 잡아 가두어도 반복될 수밖에 없는 문제다.
▼ 안 지켜지는 규제… ‘구조의 문제’ ▼
우리나라에서 정치를 하려면 많은 돈이 든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과거에 돈 안 쓰는 깨끗한 정치를 해 보겠다는 의욕으로 정계에 투신한 인사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정치인 대접도 못 받고 퇴출되거나 기존 정치 관행에 함몰돼 사라졌다.
자기 돈 쓰는 것을 좋아할 후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돈을 안 쓰려 해도 상대방이 돈 공세를 펼 경우 이를 보고만 있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 상대방이 돈을 쓰지 않을 때 돈을 쓰면 결정적으로 유리하다. 좋든 싫든 선거전에서 돈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기업이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른 기업들이 모두 유력 후보자들에게 돈을 주는데, 혼자 법을 지킨다면서 이를 외면한다면 누가 당선되더라도 결국 그 기업은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다. 또 다른 기업들이 돈을 내지 않을 때 먼저 베팅을 하면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다. 좋든 싫든 돈을 주는 것이 유리하다. 최근 일련의 비자금 사건에서 보듯, 일부 기업의 경우 오히려 적극적으로 비자금을 조성해 정치권에 제공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준 쪽에서는 강압에 의해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받은 쪽은 자발적 기부였다고 생각하는 불분명한 정치자금의 순환구조가 형성돼 있는 것이다.
전에도 이런 문제가 터질 때마다 국정조사나 특별검사제를 해 봤지만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 진상공개나 고백 사과문 발표도 전두환 대통령 이래 모든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했지만 권력형 비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이런 것은 더 이상 해결책일 수 없다. 우리나라 정치 제도의 근본적 문제는 법이 지켜지지 않는 데 있다. 법과 현실이 따로 노는 것이다. 정치자금법이 그렇고 선거법이 그렇다.
정치 관련이든, 기업 관련이든 안 지켜지는 규제의 문제점은 지키는 사람들을 바보로 만든다는 점이다. 아무도 줄을 서지 않을 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요령 좋고 약은 사람들이 법망을 피해 이득을 취하는 것을 보면서 끝까지 양심과 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또 누구나 법을 어기는 풍토에선 단속에 걸려도 반성하기보다는 억울하다는 생각부터 하게 된다. 지금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는 각 당의 관계자들은 자신들이 범법자라기보다는 재수 없이 걸린 억울한 희생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지금 여야 할 것 없이 모든 정치인들이 자기들이 만든 법규정에 걸려 허우적대고 있는 근원적 배경이다. 노무현 대통령이나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도 모두 잘못된 제도의 희생자들이다. 그 위치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모든 문제가 정경유착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당연히 정경분리를 위한 조치들이 먼저 강구돼야 한다. 정부가 기업의 생사를 좌우하고 막대한 이권을 나눠줄 수 있는 권력을 갖는 한 정경유착은 지속될 것이다.
정부의 경제적 역할과 간섭을 줄이고 경제 자유화를 통해 기업을 권력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줘야 한다. 권력에 밉보여도 문제없는 세상, 눈치 보지 않고 기업 할 수 있는 풍토가 만들어져야 한다.
▼따로 노는 법과 현실 ‘수술’ 필요 ▼
정치자금과 선거관련 규정들도 과감하게 현실화해야 한다. 지킬 수 없는 법규정은 모든 사람을 잠재적 범법자로 만든다. 그래 놓고 재수 없게 걸려든 사람들만 처벌하는 것은 정치적 음모론과 형평성 시비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정치자금 및 선거관련 규정들을 지킬 수 있도록 현실화한 뒤 이를 어기는 사람들은 모두 적발해 처벌하는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
김종석 홍익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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