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종석/정치자금법 현실화해야

  • 입력 2003년 11월 2일 18시 30분


김종석 홍익대 교수·경제학 우리에게는 무슨 사건이나 사고가 터지면 그 모든 책임을 사람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외환위기 때도 그랬고 대구지하철 화재 때도 그랬다. 지금 온 나라를 흔들고 있는 불법 정치자금 문제도 역시 부도덕한 정치인과 기업인 탓으로 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자금 문제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사람을 아무리 많이 잡아 가두어도 반복될 수밖에 없는 문제다.

▼ 안 지켜지는 규제… ‘구조의 문제’ ▼

우리나라에서 정치를 하려면 많은 돈이 든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과거에 돈 안 쓰는 깨끗한 정치를 해 보겠다는 의욕으로 정계에 투신한 인사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정치인 대접도 못 받고 퇴출되거나 기존 정치 관행에 함몰돼 사라졌다.

자기 돈 쓰는 것을 좋아할 후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돈을 안 쓰려 해도 상대방이 돈 공세를 펼 경우 이를 보고만 있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 상대방이 돈을 쓰지 않을 때 돈을 쓰면 결정적으로 유리하다. 좋든 싫든 선거전에서 돈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기업이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른 기업들이 모두 유력 후보자들에게 돈을 주는데, 혼자 법을 지킨다면서 이를 외면한다면 누가 당선되더라도 결국 그 기업은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다. 또 다른 기업들이 돈을 내지 않을 때 먼저 베팅을 하면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다. 좋든 싫든 돈을 주는 것이 유리하다. 최근 일련의 비자금 사건에서 보듯, 일부 기업의 경우 오히려 적극적으로 비자금을 조성해 정치권에 제공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준 쪽에서는 강압에 의해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받은 쪽은 자발적 기부였다고 생각하는 불분명한 정치자금의 순환구조가 형성돼 있는 것이다.

전에도 이런 문제가 터질 때마다 국정조사나 특별검사제를 해 봤지만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 진상공개나 고백 사과문 발표도 전두환 대통령 이래 모든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했지만 권력형 비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이런 것은 더 이상 해결책일 수 없다. 우리나라 정치 제도의 근본적 문제는 법이 지켜지지 않는 데 있다. 법과 현실이 따로 노는 것이다. 정치자금법이 그렇고 선거법이 그렇다.

정치 관련이든, 기업 관련이든 안 지켜지는 규제의 문제점은 지키는 사람들을 바보로 만든다는 점이다. 아무도 줄을 서지 않을 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요령 좋고 약은 사람들이 법망을 피해 이득을 취하는 것을 보면서 끝까지 양심과 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또 누구나 법을 어기는 풍토에선 단속에 걸려도 반성하기보다는 억울하다는 생각부터 하게 된다. 지금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는 각 당의 관계자들은 자신들이 범법자라기보다는 재수 없이 걸린 억울한 희생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지금 여야 할 것 없이 모든 정치인들이 자기들이 만든 법규정에 걸려 허우적대고 있는 근원적 배경이다. 노무현 대통령이나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도 모두 잘못된 제도의 희생자들이다. 그 위치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모든 문제가 정경유착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당연히 정경분리를 위한 조치들이 먼저 강구돼야 한다. 정부가 기업의 생사를 좌우하고 막대한 이권을 나눠줄 수 있는 권력을 갖는 한 정경유착은 지속될 것이다.

정부의 경제적 역할과 간섭을 줄이고 경제 자유화를 통해 기업을 권력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줘야 한다. 권력에 밉보여도 문제없는 세상, 눈치 보지 않고 기업 할 수 있는 풍토가 만들어져야 한다.

▼따로 노는 법과 현실 ‘수술’ 필요 ▼

정치자금과 선거관련 규정들도 과감하게 현실화해야 한다. 지킬 수 없는 법규정은 모든 사람을 잠재적 범법자로 만든다. 그래 놓고 재수 없게 걸려든 사람들만 처벌하는 것은 정치적 음모론과 형평성 시비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정치자금 및 선거관련 규정들을 지킬 수 있도록 현실화한 뒤 이를 어기는 사람들은 모두 적발해 처벌하는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

김종석 홍익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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