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그린의 신데렐라' 안시현 스토리

  • 입력 2003년 11월 3일 18시 16분


CJ나인브릿클래식 우승으로 퀄리파잉스쿨을 거치지 않고 마국LPGA투어에 직행한 '신데렐라' 안시현. 전문가들은 이번 대회에서 박세리를 꺾은 그의 담력과집중력이라면 미국무대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제주=뉴시스
CJ나인브릿클래식 우승으로 퀄리파잉스쿨을 거치지 않고 마국LPGA투어에 직행한 '신데렐라' 안시현. 전문가들은 이번 대회에서 박세리를 꺾은 그의 담력과집중력이라면 미국무대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제주=뉴시스
2일 오후 제주 라마다그랜드호텔. 제주 클럽나인브릿지에서 끝난 미국LPGA투어 CJ나인브릿지클래식에서 감격스러운 우승을 맛본 안시현(19·코오롱)을 만났다.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에 스커트 차림을 한 그는 “아직 우승이 실감나지 않아요”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럴 만 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않은 우승, 그녀 자신조차 20위 안에만 들어도 대성공이라고 예상했다. 미국 투어는 그동안 출전조차 해본 일이 없었고 국내 1부투어에서조차 우승이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결코 행운은 아니었다. 국내외 정상급 선수 69명이 출전한 무대에서 대회 기간 사흘 내리 선두를 지킨 것만 봐도 그렇다. 마지막 날에는 미국 투어에서 통산 20승 이상을 거둔 박세리(CJ) 로라 데이비스(영국)와의 맞대결에서 당당히 승리하지 않았던가.

이번 대회를 앞두고 안시현은 한 가지 결정을 했다. 지난해 고교 졸업 후 미뤄온 대학 진학을 위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보려던 계획을 포기한 것.

“친구들처럼 캠퍼스에서 미팅도 하고 놀러도 다니고 싶었어요. 하지만 대학은 나중에 도전할 수 있지만 이런 기회는 다시 안 올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였을까. 어느 때보다 대회 준비에 공을 들였다. 오전 6시50분에 일어나 오후 11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루 네 번씩 10시간 가까운 훈련을 한 달 넘게 해 온 것. 개막 직전 감기에 걸렸을 때는 평소 질색으로 여겨 피하던 주사까지 맞았다. 박세리는 이런 안시현을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으며 정말 잘 쳤다. 장차 나와 다시 만날 텐데 좋은 대결이 될 것 같다”고 칭찬했다.

지난해 초에는 국가대표로 뽑혔지만 프로 진출과 부산아시아경기 출전을 놓고 고민했다. 집에서는 아시아경기 출전을 원했지만 프로선수로 경험을 쌓겠다고 고집을 피워 일찌감치 프로에 뛰어들었다. 이 결정 역시 옳았다. 2부 투어에서 상금왕에 올라 올해 1부 투어 풀시드를 받았으니까.

늘 웃는 얼굴로 환한 인상을 주는 안시현은 좀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는 성격. 그런 그도 두 번 울어본 옛날 기억을 떠올렸다. 첫 번째는 이날 우승하고 나서 캐디 겸 코치인 정해심 프로와 껴안으면서 눈시울을 붉힌 것. “고생했던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어요.”

두 번째는 중학교 때인 1999년 집안이 기울어 부모님으로부터 골프를 그만두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였다. “아버지가 코치님을 찾아가서 더 이상 운동 못 가르치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하도 울어 눈이 안 보일 만큼 퉁퉁 부었어요. 정말 힘들었죠. 다행히 주위의 도움과 정 코치님의 배려로 골프를 계속할 수 있었어요.”

지난해까지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안시현은 올해 들어 코오롱과 스폰서 계약을 했고 상금도 1억원 넘게 벌면서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됐다. 이번 대회에서도 우승 상금과 소속사 보너스 등을 합해 단번에 3억원 가까이 벌어들였다.

외모와 실력을 갖춘 스타성도 인정받고 있다. 코오롱측에서도 안시현의 이런 잠재력을 높이 사 후원 계약을 성사시켰다는 후문. 안시현은 “골프를 안 했다면 연예계에 진출했을 것”이라며 타고난 끼를 감추지 않았다. TV출연 요청이 들어온다면 기꺼이 응할 생각이라는 것. “영화배우인 정준호씨가 제 이상형이에요. 골프를 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한 번 치자는 말이 들어오면 좀 튕기다 나가고 싶어요.”

친한 동료 프로골퍼는 동갑내기 김주미(하이마트). 친구이자 라이벌인 김주미와는 아마추어시절 캐디 백을 매줄 만큼 가깝다. 하지만 김주미가 지난해 아시아경기에서 금메달을 따고 올 시즌 신인왕에도 자신을 제치고 오르자 속이 상하기도 했다. “그동안은 내가 늘 축하해주는 입장이었어요. 오늘은 주미가 먼저 전화를 해줬더군요. 앞으로도 선의의 경쟁을 했으면 좋겠어요.”

최근 장만한 승용차로 시속 200km까지 밟았을 만큼 스피드광인 안시현. 그의 눈은 이제 더 넓은 바깥세상을 향한다. ‘꿈의 무대’로만 여겼던 미국 투어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당초 국내에서 1승 정도 한 뒤 미국 투어에 도전하려고 했는데 빨라졌어요. 준비를 완벽하게 해야죠. 실력도 더 키우고 영어도 배우고…. 땀 흘린 만큼 꼭 보람은 있기 마련이잖아요.”

어려움과 선택의 순간을 헤쳐 나온 신데렐라. 그의 밝은 웃음은 희망을 가득 담고 있었다.

제주=김종석기자 kjs0123@donga.com

▼인터넷 팬 카페 인기 폭발▼

냉혹한 승부사적 기질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안시현은 "골프를 안 했다면 연예계에 진출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타고난 '끼'를 감추지 않았다. 제주=뉴시스

‘그린의 신데렐라’ 안시현은 인터넷에서도 ‘신데렐라’.

안시현이 미국LPGA투어 첫 승을 이룬 다음날인 3일 안시현의 인터넷 카페인 ‘프로골퍼 안시현(cafe.daum.net/ansihyeon)’은 70여명에 불과했던 회원수가 2000명을 돌파했다.

카페에 회원으로 가입한 네티즌들은 안시현의 우승을 축하하는 글을 남겼고 ‘시현이의 일기’ ‘안플님 이모저모’ 등 고정코너를 읽기 위해 ‘등업(회원 등급을 올리는 것)’ 요청이 쇄도할 정도.

‘골프도 잘하면서 얼굴까지 예쁘다’ ‘웬만한 연예인보다 낫다…’. 안시현은 네티즌들의 폭발적인 반응에 대해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기분이 좋다”면서도 “국내 여자골프계에는 나보다 훨씬 예쁜 선배들이 많다”며 겸손해했다.

그가 그동안 카페에 띄운 일기엔 ‘톡톡 튀는 신세대 안시현’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오늘 프로암대회했어요… 우리 팀이 우승을 했어요∼ 내일두 잘 쳐야 할 텐데… 저를 조아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열심히 할 거예요∼ 마니마니 응원해주세용∼’ (9월 23일)

‘오늘 시합 첫날이었는데… 내 자신한테 실망했어∼ 내일두 있구 모레두 있으니까… 힘내야징∼ 우승하구시퍼∼ 낼을 위해서 잘 자구 마니 먹어야징∼’(10월 1일)

‘시합 때마다 2등만 해서 아쉽구 속상하구 답답해요… 속상해 죽겠어T.T 근데…울플님은 항상 다잡은 우승 놓쳤다구… 물론 잘 알죠∼ 전 더 아깝구 속상하구 울고 싶은데…’(10월 11일)

‘어제 제주도에서 왔는데…감기 걸렸어요∼T.T 나만 그런가?? ㅋㅋ 제가∼이번엔∼목표가 있어요… 잘 치는 것보다 자신감을 찾는 거예요.’

안시현은 CJ나인브릿지클래식 참가 직전인 지난달 25일자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그리고 자신감을 되찾은 것은 물론 꿈같은 미LPGA투어 첫 승까지 올렸다.

권순일기자 stt77@donga.com

▼LPGA직행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한 격▼

‘신데렐라’ 안시현이 CJ나인브릿지클래식에서 우승해 미국LPGA투어에 직행한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간 것’에 비유된다.

매년 미LPGA 퀄리파잉스쿨(Q스쿨·시드 결정전)에 도전하는 선수는 500여명. 그중 풀시드를 받는 선수는 20명 안팎. 지난해 국내무대 3관왕인 이미나(22)가 올 Q스쿨에서 낙방한 것을 보면 ‘실력=합격’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Q스쿨 도전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현지 적응기간인 3개월간 레슨비와 체재비 등 각종 경비로 5만∼10만달러가 필요하다. 안시현은 이번 우승으로 험난한 Q스쿨과 엄청난 경비 조달 문제를 한 방에 해결했다.

안시현은 또 꿈의 무대인 미LPGA투어에 진출함으로써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쥘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우선 그는 CJ나인브릿지클래식 우승상금 18만7500달러를 거머쥐었다. 이는 3일 현재 미LPGA투어 상금랭킹 50위권.

미LPGA 규정에 따라 정규멤버가 아닌 안시현은 이번 우승으로 2년간 시드를 받았지만 첫해인 2004시즌은 조건부 시드로, 2005년에는 풀시드로 뛰게 된다. 그러나 조건부 시드라고 해도 1번이기 때문에 사실상 풀시드와 마찬가지. 대회마다 1명 이상은 대회출전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안영식기자 ysahn@donga.com

▼안시현과 정해심 프로▼

안시현의 ‘영원한 스승’ 정해심 프로(45·사진). 그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안시현이 중학교 2학년 때이던 1997년에 사제관계를 맺어 벌써 7년째. 99년 안시현의 집안 형편이 기울어 더 이상 골프를 가르칠 수 없게 됐을 때는 “내가 맡겠다”며 자신의 집에 데리고 와 운동을 시켰다.

외아들을 둔 정 프로는 가족관계를 묻자 “집사람과 아들, 그리고 시현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만큼 안시현은 그에게 친딸이나 다름없다.

정 프로는 스파르타 훈련의 신봉자. 자신이 운영하는 인천 영종도의 IJ골프아카데미에서 안시현에게 하루 10시간이 넘는 강훈련을 시켰다. 그래도 안시현은 하얀 피부를 유지해야 한다며 치열한 승부 도중 그늘집으로 사라져 자외선차단제를 바를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는 게 그의 회상.

미국 진출을 앞둔 안시현을 정 프로는 어떻게 전망할까. “시현이는 적응력이 뛰어난 편입니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도 연습라운드를 27홀밖에 못했는데 첫날부터 7언더파를 쳤거든요.”

안정된 스윙에 정확한 임팩트를 갖고 있어 서양 잔디에 강한 점도 유리하게 작용하리라는 게 그의 평가. 정 프로는 미국에도 안시현과 함께 건너가 계속 호흡을 맞출 계획이다.

제주=김종석기자 kjs012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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