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461…잃어버린 계절(17)

  • 입력 2003년 11월 6일 18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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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마음산 꼭대기에 오르자, 경순이하고 혜자는 하나 빠졌다, 둘 빠졌다 하고 집으로 돌아갔지만…나는 집에 가기가 싫었어예. 우리 아버지는 내가 백일도 되기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엄마는 여자 혼자 몸으로 자식 넷을 키우다 내가 열두 살 때 재혼을 했어예. 상대는 결핵으로 아내를 잃은 마흔다섯 살 남자였고, 딸이 둘 있었지예. 그 언니들은 마침 시집 갈 나이라, 같이 산 지 1년도 못 돼서 시집을 갔습니다.

나는 양아버지를 한 번도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어예. 아버지는 내게 이름을 지어주고 돌아가신 아버지, 그 사람뿐이지예. 양아버지는 그런 나를 싫어해서, 입만 열었다 하면 여자가 공부하면 여우가 된다, 이제 곧 열네 살이니까 어서 시집이나 가라고 성화였어예. 내가 거슬렸던 거지예. 엄마는 양아버지가 무슨 소리를 해도 묵묵히 바느질만 했습니다. 재혼하기 전에는 늘 내 편을 들어주었는데, 재혼을 하더니 양아버지의 신하가 돼버린 기지예. 나는 공부가 하고 싶었어예. 엄마처럼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하고 결혼해서, 식모처럼 일하고 바느질만 하기는 싫었지예. 보통학교를 졸업하면 부산여고에 가고 싶었어예. 하지만도 그런 말은 꺼낼 수도 없었습니다. 오빠 셋이 전부 소학교밖에 안 나왔으니까네예. 양아버지도 절대 허락할 리가 없고예. 여학교에 가겠다고 하면, 너 이년 여우가 다 됐구나!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교과서를 다 내다 불태웠을끼라예, 그런 사람이라예, 양아버지라 카는 사람이….

해가 다 떨어져서 사방이 어둑어둑해졌는데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어예. 양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들판에서 자는 편이 낫지예.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무슨 재미있는 일은 없을까 하고 생각하는데, 바로 앞 둑 위로 달려오는 두 분의 모습이 떠올랐어예. 그리고 그 숨소리도, 큐큐 파파, 큐큐 파파 하는 숨소리가 다가오고, “고맙다!”고 외치는 우근씨의 목소리가 되살아나는 순간, 뒤에서 발소리가…. 돌아보았더니, 사냥모를 쓴 남자가 서 있는 기라예. 일본 군복 공장에서 일하지 않겠어요 돈을 많이 받고 맛있는 것도 먹고 예쁜 옷을 입어요 삼년 일하면 집에 돌아와요 그 전에 시집가면 언제든지 집에 와요. 말이 너무 이상해서, 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어예.”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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