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사라져 가는 목소리들'…한국어가 사라진다면

  • 입력 2003년 11월 7일 17시 23분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훌라춤을 추고 있는 무희들. 하와이어로 나타낼 수 있었던 수백가지 물고기 이름과 함께 사라져 가던 ‘하와이어’는 1978년에야 영어와 더불어 공용어로 인정받아 명맥을 잇게 됐다.동아일보 자료사진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훌라춤을 추고 있는 무희들. 하와이어로 나타낼 수 있었던 수백가지 물고기 이름과 함께 사라져 가던 ‘하와이어’는 1978년에야 영어와 더불어 공용어로 인정받아 명맥을 잇게 됐다.동아일보 자료사진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 지음 김정화 옮김/392쪽 1만8000원 이제이북스

어느 날 갑자기 한국어가 사라진다면? ‘말도 안돼, 그럴 리가 있겠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충격으로 와 닿는다. 그건 소망이자 당위일 뿐, 현실은 아닐 수도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끔찍한 일이다.

언어의 생멸(生滅)을 논할 때 흔히 라틴어가 언급된다. 불과 1700년대까지만 해도 유럽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사용한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모국어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상호이해를 위해 사용하는 언어)였던 라틴어가 오늘날은 극소수가 쓰는 종교언어로만 명맥을 유지하게 된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임에 틀림없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인구 7000만명의 한국어가 사라질까? 장담할 수는 없다. 기원 후 1000년경까지 라틴어, 그리스어와 더불어 유럽의 가장 오래된 문헌에 기록됐던 유서 깊은 언어인 아일랜드어의 경우도 1990년 조사에 따르면 애착을 가진 사용자가 고작 9000명 미만으로 줄어 있었다.

저자들은 지난 500년 동안 세계 언어의 절반 정도가 사라졌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매일 언어들이 죽어가고 있음을 밝힌다. 언어는 왜 사라지는가? 저자들은 사용자가 10명 내외인 언어부터 100만명 이하인 많은 언어들이 자연 선택적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살해’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국가는 200여개인데 세계의 언어는 6000여가지로 추산된다. 사용자가 많은 상위 15개 언어가 세계인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데, 나머지 60%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세계 인구의 4%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들에 의하면 상위 언어들이 나머지 60%의 언어들을 살해해 왔고 살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민족을 몰살시킴으로써 언어가 살해되기도 하고, 경제적 조건들을 변경시킴으로써 사용자들이 경제적 지배자들의 언어를 ‘선택’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선택은 아니다.

그렇다 한들 언어가 사라지는 것이 무슨 대수일까? 저자들은 학문적, 도덕적, 심미적 이유에서 언어들의 죽음을 논하지 않는다. 그들은 놀랍게도 언어적 다양성과 생물적 다양성이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언어들의 죽음은 바로 경제적 억압으로 인한 소수민족의 종말과 연계돼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저자들은 언어적 다양성의 급격한 소멸이 인간 정신의 진화에 커다란 저해요소가 될 것임을 경고한다. 토착어로 표현됐던 인류의 지식과 지혜들이 언어의 소멸과 함께 사라진다. 사람들은 흔히 동식물의 소멸이나 생물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많은 신경을 쓴다. 언어적 다양성도 이와 똑같다는 사실을 저자들은 누누이 강조한다. 6000여개의 언어를 죽이면서 영어나 중국어 등 몇 개의 언어가 세상에 남겨졌을 때, 이미 그것은 늦은 것이다. 하와이어로 나타낼 수 있었던 수백가지 물고기 이름들을 영어로는 표현할 수 없고, 따라서 그런 지식들은 사라지게 된다. 그럼에도 하와이어는 1978년에야 영어와 더불어 공용어로 인정받게 됐다.

터키와 그 주변에 흩어져 사는 1000만명이 넘는 쿠르드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투옥되고 처형되면서도 언어를 지키고자 한다.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경험이다. 흔히 말하듯이 언어는 정체성이고 혼이기 때문이다. 저자들이 말하다시피 언어적 다양성의 보존은 이상적 과거에 대한 감상적 찬미가 아니라, 지속가능하고 지역상황에 맞게 운명을 결정하려는 권리를 되돌려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저자 다니엘 네틀은 생태인류학을 전공한 영국왕립인류학회 회원, 수잔 로메인은 언어학을 전공한 옥스퍼드대 교수다.

장영준 중앙대 교수·영문학 yjang@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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