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耳順)을 맞이한, 1984년 ‘소설문학상’ 수상작가의 자선(自選) 단편선.
표제작 ‘가을공연’에서 중학생인 주인공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알맹이를 빼앗긴 앙상한 밤나무 숲,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교정, 바람이 흩어지는 수수밭 등의 전원적인 풍경이다. 그러나 황량함을 동반한 쓸쓸함이 이런 풍경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낯선 군인들이 읍내를 차지하려 몰려들게 될지도 모른다’든가, ‘어디선가 전염병이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등의 흉흉한 소문이 도는 것은 작품에 묘사된 시기가 전통적인 질서를 파괴당한 불안의 시기임을 암시한다.
이런 마을에 오랜만에 황량하지 않은 반가운 소문이 돈다. 지나간 좋았던 시절을 상징하는 ‘가을 공연’이 다시 열린다는 것.
주인공은 한나절을 기다려 저녁에야 읍 공관에 도착한다.
‘믿을 수 없는 일과 나는 만나고 있었다. 읍 공관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끊임없는 웅성거림과 여기저기서 휙휙 불어대는 휘파람 소리는 아니었다. 읍 공간의 휑뎅그렁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싸늘한 어둠과 침묵뿐이었다.’
독자는 책 도처에서 적막감을 동반한 이런 상실과 만나게 된다. 문학평론가 변지연은 이 책을 채우는 세계를 ‘본질적으로 외롭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내성적인 것’들의 ‘슬픔의 카니발’로 규정한다.
일본 신세대 소설을 통해 익숙해진 ‘상실’의 정조(情調)를 연상할 수 있겠지만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우리나라에 소개되기 이전인 1970, 80년대 창작된 작품이 대부분이다.
“쓰고 싶어서 쓴 소설, 저절로 우러나듯이 씌어진 소설들이다… 심심해서 혹은 작품을 쓰는 일이 즐거워 원고지를 채웠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작가는 현재 동국대 사범대 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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