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포'…표류女人, 로빈슨 크루소를 만나다

  • 입력 2003년 11월 7일 17시 48분


존 쿠체의 장편 ‘포’에서 작가는 디포가 쓴 ‘로빈슨 크루소’의 텍스트를 뒤집어 읽으며 크루소의 욕망, 크루소와 프라이데이의 관계 등을 새롭게 해석한다.동아일보 자료사진
존 쿠체의 장편 ‘포’에서 작가는 디포가 쓴 ‘로빈슨 크루소’의 텍스트를 뒤집어 읽으며 크루소의 욕망, 크루소와 프라이데이의 관계 등을 새롭게 해석한다.동아일보 자료사진
◇포/존 쿠체 지음 조규형 옮김/247쪽 9000원 책세상

납치된 딸을 찾기 위해 브라질을 헤매던 영국인 여성 수잔. 성과 없이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돌아오던 중 선상 반란을 만나 조각배에 표류하는 신세가 된다.

간신히 발을 디딘 육지에는 외부와 고립된 두 사람만이 살고 있다. 예순 살 쯤 된 노인 로빈슨 크루소, 혀를 잘려 말을 못 하는 흑인 프라이데이.

올해 노벨상 수상작가 존 쿠체가 1986년 발표한 이 소설은 대니얼 디포(1660∼1731)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에 대한 ‘다시 읽기’ 텍스트다. 첫 두 장에서 수잔이 묘사하는 크루소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사뭇 다르다.

수잔은 ‘자신의 왕국에서 늙어 가면서 시야가 좁아져, 자신이 세상에 대해 모두 알고 있다고 믿게 된 노인’으로 그를 묘사한다. 디포의 소설에서와 달리 그에게는 섬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도, 달력을 기록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

이 섬에서 식인종의 상륙과 같은 흥미진진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프라이데이도 식인종에게서 구출된 것이 아니라 난파된 배에서 크루소와 함께 탈출한 노예로 그려진다.

번역자가 후기에 밝히고 있듯, ‘Robinsonads(로빈슨류·流)’라는 영어 단어가 생겨날 정도로 ‘로빈슨 크루소’의 속편은 3세기 동안 수없이 생겨났다. 그러나 쿠체의 작업은 디포의 텍스트에 이어지는 스토리가 아니라 ‘원작과 상이한 텍스트’를 드러내려 한 시도라는 점에서 독특한 영역을 갖는다.

전반부는 수잔이 자신의 경험담을 책으로 만들기 위해 작가 포에게 보낸 편지. 이 부분을 읽어 내려가며 독자는 ‘로빈슨 크루소’ 텍스트의 형성과정에 궁금증을 갖게 된다. 작가는 임의로 수잔의 표류 부분을 뺀 뒤 식인종 이야기를 덧붙이고, 끊임없이 문명세계를 그리워하는 사람으로 로빈슨을 변조해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로 세상에 내놓은 셈이 된다.

소설 속의 작가 포는 파산해 잠적하고, 3장에서 간신히 그를 찾아낸 수잔은 자신의 이야기를 변조하려는 작가에게 끊임없이 저항한다. 수잔의 편지 및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쿠체는 ‘텍스트란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한 숙고를 펼쳐낸다. 포는 ‘가장 마지막에 말을 전하는 사람이 가장 큰 힘을 가진 사람’이라며, 작가로서의 권력을 행사하려 한다. 이에 대해 수잔은 “알리고 고칠 수 있는 힘이 아직은 제게 있어요. 저는 여전히 제 이야기의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라며 뜻을 굽히지 않는다. 수잔은 작가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해 버린 이상, 자신의 진짜 삶은 남아있지 않다며 자신이 ‘유령’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느낀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쿠체는 작가로서의 힘에 대한 자의식과 이에 대한 비판적 숙고를 동시에 드러낸다. 작가는 텍스트 안에서 신과 동등한 존재가 된다. “신이 글을 쓴다면, 그는 우리가 읽을 수도 없는 비밀스러운 글을 쓸 것이고, 우리가 바로 그 글의 일부인 거지요.”

제목 ‘포’는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 디포(Defoe) 집안이 그의 아버지 대까지 사용하던 성을 딴 것. 영어의 ‘Foe’는 ‘적’ ‘훼손자’를 나타내기도 한다. 작가는 텍스트를 성립시키는 과정에서 끊임없는 ‘훼손’을 가하는 진실의 ‘적’임을 상징하는 것일까.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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