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천광암/'현찰 75억원'

  • 입력 2003년 11월 7일 18시 12분


“돈의 단위가 클수록 예산을 깎기가 힘들어요. 1억원 미만은 필요한 돈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는데 억대를 넘어가면 얼마나 큰돈인지 피부에 와 닿지 않아서 자신이 없어요.” 10년 넘게 예산업무를 해 온 한 공무원의 말이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터져 나오는 수십억, 수백억원대 정치자금 비리를 지켜보는 국민도 비슷한 혼란을 느낄 것이다.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 액수라서 얼마나 분노를 해야 할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지경이다. 때마침 벌어진 두 사건이 아니었다면 그냥 그러려니 지나쳤을지 모를 일이다.

▷어제 아침 신문을 본 독자는 거실에 수북이 쌓인 현찰더미 사진에 눈길이 멎었을 것이다. 평생 현금 1억원도 구경하기 힘든 서민들이 언제 현찰 75억원을 구경해 보겠는가. 하기야 머잖아 ‘다이너스티’ 승용차가 현금 40억∼50억원을 싣고 달릴 수 있는지, 없는지도 보게 될지 모르겠다. 현대그룹 비자금 200억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에 대한 공판에서 검찰과 변호인이 설전을 벌이자 재판부가 현장검증을 하기로 했으니까. 대선자금에 대한 검찰수사가 확대일로에 있으니 더 기막힌 구경거리를 볼 수도 있을 터이다.

▷아무튼 통화당국이 10만원짜리 고액권을 만들지 않은 것은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경제논리에는 맞지 않는다. 10만원짜리 자기앞수표의 평균수명은 8일로 1만원짜리 지폐의 4년에 비해 턱없이 짧다. 이에 따른 비용 낭비가 적지 않다. 10만원권이 만들어지면 주민등록번호를 적고 신분증을 내보이고 하는 불편도 없어진다. 더구나 1인당 국민소득이 394달러일 때 등장한 1만원짜리가 1만달러 시대에도 최고액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도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남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어두컴컴한 지하주차장에서 땀을 흘리는 번거로움마저 없었다면 ‘검은돈’은 더 기승을 부렸을 게 분명하다.

▷우리나라 화폐에는 은행권 명칭, 액면, 발행기관, 제조기관 등 기본적인 사항만 적혀 있다. 그러나 외국 화폐에는 표어나 문구가 적혀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미국 달러화에는 ‘우리는 신을 믿는다’고 쓰여 있다. 북한의 1원짜리 지폐에는 ‘세상에 부럼 없어라’라는 글귀가 보인다. 돈을 뜻하는 영어 ‘Money’의 어원인 라틴어 ‘Moneta’에는 ‘경고·충고’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만약 우리나라가 1만원권에 경고문을 넣는다면 어떤 내용이 적당할까. 나라 체면만 아니라면 ‘현찰 너무 밝히다간 감옥 간다’가 딱 맞겠다.

천광암 논설위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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