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공종식/'전경련 선언' 성공하려면

  • 입력 2003년 11월 7일 18시 12분


“대가성 여부와 상관없이 법적인 상한액을 넘는 정치자금에 대해서는 기부자나 정치인을 모두 처벌하자.”

“20만원 이상 정치자금 기부자에 대해서는 그 명단과 기부 액수를 외부에 공개하자.”

시민단체의 정치개혁 촉구 주장이 아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6일 발표한 정치자금제도 개선 방안에 나오는 내용이다.

요즘 전경련은 바쁘다. 정치자금에서부터 지구당제도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개혁안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정치개혁의 전도사’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지난달에는 회장단 간담회에서 “정치권이 정치자금법을 제대로 개혁하지 않으면 정치자금을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재계의 선언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경련은 지난해 2월에도 총회가 끝난 뒤 “불법 정치자금을 내지 않겠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결의안을 채택할 당시 261개 전경련 회원사 대표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SK그룹 관계자는 당시 본보 기자에게 “외환위기 후 기업들의 경영이 투명해져 불법정치자금은 조성할 수 없게 됐다”며 “나중에 죄인 취급을 받는데 어떻게 음성적인 정치자금을 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선언 이후 실제상황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결의대로 지키지 않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이를 게임이론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계약을 놓고 A, B 두 기업이 경쟁한다고 하자. A사는 B사가 뇌물을 줄지 안 줄지 모른다. 만약 B가 뇌물전략을 쓴다면 A도 같은 방법으로 대응해야 한다. 또 B가 뇌물을 안 주고 A만 뇌물전략을 쓴다면 A는 더욱 유리해진다. 결국 B가 어떤 선택을 하든 A는 뇌물전략을 쓰는 것이 유리하다.

이 때문에 불법정치자금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재계 전체의 ‘집단행동’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불법정치자금이나 뇌물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만 있다면, 정치권에서 “C기업은 이미 상당액을 냈다”며 압박을 가해 와도 이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재계는 ‘게임’에 진정으로 힘들어하는 눈치다. 큰 실익도 없이 매번 정치권과의 냄새나는 거래에 연루되면서 국민의 지탄을 받는 것에 대해 “이제 악순환을 끝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실제로 이미 시장메커니즘이 상당부분 작동하면서 정치권에 잘 보여 얻을 것도, 기대할 것도 그다지 많지 않다. 재계의 선언이 ‘집단행동’으로 이어지면서 한 사람의 낙오자 없이 성공하기를 기대한다.

공종식 경제부 기자 k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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