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464…잃어버린 계절(20)

  • 입력 2003년 11월 10일 18시 27분


비가 하늘의 어둠에서 부슬부슬 떨어져, 바다의 어둠에 무수한 구멍을 뚫었다. 나미코는 낙원의 첫날밤으로 내려갔다. 새카만 파도 사이사이로 남자들의 몸이 일어섰다 덮치고, 또 일어섰다 덮치고, 몸부림치는 소리, 신음하는 소리, 우는 소리, 외치는 소리, 과거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온갖 소리가 파도와 빗소리에 뒤엉켜, 과거 그때보다 더 아프게, 더 고통스럽게, 과거 그때보다 더 애절하고 구슬프게, 나미코의 말은 우철의 마음에 무수한 구멍을 뚫었다.

입을 벌려 말을 하고 있는지, 입을 꼭 다물고 말을 삼키고 있는지 나미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지나 남자들이 곤봉을 움켜쥐고 큰 길을 활보하고, 일본 남자들은 길가에서 뺏기고 얻어맞고, 능욕당했다. 인력거에서 끌려 내려와 인력거를 끄는 일본 남자, 동포를 배신했다고 동포들에 에워싸여 공처럼 이리저리 걷어차이는 지나 사람.

도망 온 길을 돌아보니, 여기저기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나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의 집을 불사르고 있는 것이다. 불똥이 떨어졌다, 머리로, 어깨로, 그림자에도…눈에 들어가면 눈이 먼다, 두 손으로 얼굴을 덮는 순간, 듬직한 두 팔이 나미코를 꼭 껴안았다.

“웁니까…이런 나를 위해서…이런….” 나미코는 우철의 팔을 살며시 만졌다.

“…돌이킬 수는 없어도…잊을 수는 없어도…그런 기억 모두를 껴안고, 그래도…그래도 살아야재…조선이 일본 것이 된 지 35년, 우리는 조선이 우리 것이었던 때를 모른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손발에 목까지 다 묶이고, 재갈까지 물고 살았으니까네…그러니 오늘부터 자유라고 해도, 마음대로 걷지 못했던 두 다리는 휘청거리고, 빛에 익숙하지 않은 눈은 부셔서 견딜 수가 없고…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아프고 아파서…하지만 그 아픔과 함께 계속 걸으면 언젠가는 조선 사람의 조선에 도달 안 하겠나…아이쿠야, 내가 이런 말을 할라고 한 기 아인데…아무 말도…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하지만도 이것만은 믿어라. 너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 잘못한 게 없으니까, 누구한테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얼굴을 꼿꼿하게 들고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 나하고 같이 밀양에 가자.”

“…”

“그란데, 이름이 뭐꼬?”

“…말 못해예…미안합니다.”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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