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99>卷三. 覇王의 길

  • 입력 2003년 12월 4일 18시 35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더해지는 깃과 날개(3)

팽월을 기다리는 사이에 패공은 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게 했다. 거야택(巨野澤)이 아주 먼 곳이 아니고, 팽월 또한 어제 오늘 알려진 사람이 아니라, 관영(灌영) 말고도 그를 아는 사람은 많았다.

그들에 따르면, 팽월은 방금 그들이 에워싸고 있는 창읍(昌邑) 사람으로 자를 중(仲)이라 썼다. 그는 용력(勇力)이 남다르고 품은 뜻이 컸으나 진나라의 폭정을 맞아 그 뜻을 펴볼 길이 없었다. 일찍부터 마음이 맞는 무리를 데리고 거야택에 숨어들어 물고기를 잡으며 살았는데, 때로 무리를 위해서는 도적질도 마다하지 않았다.

진나라 관부가 진작부터 팽월이 하는 짓을 알고 여러 번 군사를 풀어 잡으려 하였다. 하지만 거야택의 넓고 깊은 물과 물가의 짙은 숲이 그를 감추어주는 데다, 그 무리의 나가고 물러남을 헤아리기 어렵고 움직임이 워낙 재빨라 아무리 애를 써도 잡을 수가 없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팽월의 이름만 키워줄 뿐이었다.

진승(陳勝)이 일어나고 항량(項粱)이 그 뒤를 따르자 평소 팽월을 우러르던 젊은이들이 찾아와 말했다.

“지금 여러 호걸들이 진나라에 맞서려고 다투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협(大俠)에게도 그들 못잖은 재주와 인망이 있으시니 한번 몸을 일으켜 보시지요. 우리 모두 목숨을 바쳐 대협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팽월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지금은 두 마리 용이 한창 싸우고 있으니 함부로 일어설 때가 아니오. 조금 더 기다려 봅시다.”

그가 말한 두 마리 용이란 진나라와 진승이 세운 ‘장초(張楚)’를 말하는 것이었다. 젊은이들도 그 말을 옳게 여겨 그냥 돌아갔다. 그러나 한해가 지나 진승과 항량이 모두 죽은 뒤에도 천하가 여전히 죽 끓듯 하자 젊은이들도 더 기다리지 못했다. 거야택의 늪과 못 부근에서 힘깨나 쓰는 100여 명이 모여 다시 팽월을 찾아갔다.

“천하의 형세를 보니 이제 더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저희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저희들을 이끌어 주십시오.”

하지만 팽월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직도 때가 아니오. 게다가 천둥벌거숭이 같이 앞 뒤 모르고 날뛰는 그대들과는 더욱 함께 할 수 없소.”

그러자 젊은이들이 엎드려 빌며 저희들의 우두머리가 되어달라고 떼를 썼다.

“부디 저희를 저버리지 말아주십시오. 대협께서 시키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따르겠습니다.”

젊은이들이 거듭 그렇게 빌다 나중에는 목숨까지 걸자 마침내 팽월이 그들과 함께 하기를 허락했다.

“좋소! 그럼 함께 일어나 봅시다.”

그리고는 전에 없이 엄숙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우리가 창칼을 들고 진나라에 맞서 싸운다면 이는 곧 군대를 이룬 것이며, 그대들이 이왕에 나를 우두머리로 세웠으니 나는 그 군대의 장수요. 이제 장수로서 첫 번째 군령(軍令)을 내리겠소. 그대들은 지금 돌아가 각기 행군할 채비를 한 뒤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되, 해가 돋기 전에 모두 모여야 하오. 만약에 시각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그 목을 베어 군령을 세울 것이오!”

젊은이들은 팽월의 그같은 돌변에 움찔했으나, 이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돌아갔다. 그들의 마음가짐이 그렇다 보니 정해둔 시각이 제대로 지켜질 리 없었다. 이튿날 해가 돋은 뒤에 온 젊은이가 열 명이 넘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늦은 자는 해가 중천에 떠서야 그곳에 이르렀다.

전포에 칼을 차고 나와 기다리던 팽월은 시각에 맞춰 온 젊은이들 중에서 굳세고 날래 보이는 자를 골라 부장(副將)으로 삼았다. 그리고 모두 한군데 모여 서게 한 뒤 마지막 젊은이가 이르기를 기다려 차갑게 말했다.

“너희들은 나이든 나를 찾아와 억지로 너희들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그래서 나는 어제 장수로서 해가 돋기 전에 모이라는 첫 번째 군령을 내렸고, 너희들은 그걸 지키겠다고 약조하였다. 그런데도 이토록 약조를 어긴 사람이 많으니 어찌된 일이냐? 그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으니, 가장 늦게 온 사람이라도 목 베 군령을 세워야겠다!”

그리고는 부장으로 삼은 젊은이에게 가장 늦게 온 자를 목베게 했다. 사람들은 모두 팽월이 그들을 겁주기 위해 한번 해보는 소리로만 들었다. 히죽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어찌 그렇게까지 할 수야 있겠습니까? 이번은 처음이니 그냥 넘기시지요. 다음부터는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팽월이 칼을 빼들며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너희들은 무도한 진나라를 쳐 없애려고 일어난 의군(義軍)이다. 의군도 군사거늘 군령을 어기고 어찌 살기를 바란단 말이냐!”

그러면서 가장 늦게 이른 자를 단칼에 목베어 버렸다.

"내 비록 이 사람을 죽였으나 이 사람이 미워서가 아니다. 이웃에 살던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태산같은 군령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이제 이 목을 바쳐 군기(軍旗)에 제사를 올릴 터이니 모두 그리 채비하라!”

팽월이 그 목을 주워들고 그렇게 말하자 젊은이들은 모두 몸을 떨었다. 그러나 팽월은 표정 하나 변하는 법 없이 그 목을 제단에 바치고 무운(武運)을 빌었다.

그 뒤 그들 무리는 팽월의 명이면 사소한 것이라도 감히 어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모두 두려움에 떨며 얼굴을 들고 팽월을 바로 보기조차 못할 지경이었다. 팽월은 그렇게 군율(軍律)이 선 젊은이들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떠다니며 진나라 작은 관부(官府)를 들이치고 그 땅을 털었다.

팽월의 군사들이 워낙 바람처럼 나타나고 연기처럼 사라지니 작은 고을에서는 그들을 당해낼 길이 없었다. 그러자 그의 이름이 더욱 높아져 세력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장함에게 모질게 당해 흩어진 제후들의 군사들이 그에게 의지하러 몰려드니 그 군사는 금세 1000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그 같은 팽월의 세력으로는 이곳저곳 흘러 다니며 분탕질을 칠 수는 있어도 독자적인 세력으로 천하의 풍운에 끼어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팽월이 남몰래 고심하고 있을 때 유방의 군사들이 북쪽으로 쳐 올라오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나무는 큰 나무 아래서는 자랄 수 없지만, 사람은 큰 사람 밑에서도 클 수가 있다 한다. 어쩔 수 없구나. 유방이라고 했던가. 그를 한번 찾아가 보자. 초나라 회왕(懷王)이 길을 나누어 보낸 장수인데다, 군세도 2만이 넘는다고 하지 않은가. 더구나 그가 뺏으려고 하는 창읍은 내 고향이라 잘 아는 땅이니 내 비록 거느린 군사가 많지 않으나, 그를 도와 한 몫을 해낼 수는 있을 것이다.......)

팽월은 속으로 그렇게 헤아리며 패공을 찾아왔다.

하지만 팽월이 찾아와 패공을 도와도 창읍의 싸움은 뜻 같지가 못했다. 패공은 반갑게 팽월을 맞아들여 그를 선봉 가운데 하나로 세우고, 그가 알고 있는 창읍의 지리(地理)를 십분 활용했으나 끝내 성을 떨어뜨릴 수는 없었다. 창읍의 방비가 워낙 단단한 데다 팽월의 도움에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팽월은 작은 병력을 이끌고 이리저리 떠돌며 치고 빠지는 일에는 능하지만, 성 안에 틀어박힌 적을 많은 병력으로 에워싸고 치는 데는 그리 큰 힘을 쓰지 못했다.

“안 되겠다. 창읍은 이만 버려 두고 바로 관중(關中)으로 가자!”

며칠이나 거듭 성을 들이쳐도 군사와 물자만 헛되이 축나자 패공은 마침내 그렇게 마음을 바꾸었다. 무엇이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걸 좋아하고, 그래서 잘 안 되는 일에 억지를 부리지 않는 패공다운 결정이었다. 그러자 팽월이 말했다.

“저는 아무래도 이곳에 남는 게 좋을 듯 합니다. 비록 많지 못한 군사이나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진군을 괴롭히면 그들을 적지 아니 이곳에 묶어둘 수 있으니, 그 또한 패공을 뒤에서 돕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지난번에 장함이 위(魏)나라를 쳐부수고 위왕 구(咎)를 죽인 뒤로 수많은 그 군사들이 부근 사방에 흩어져 떠돌고 있습니다. 그들을 모아 진나라에 맞설 세력으로 묶는 것도 제가 할 수 있는 큰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무리를 이끌고 원래 있던 거야택(巨野澤)으로 돌아가 버렸다. 패공도 그런 팽월을 잡아둘 길이 없어 그대로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뒷날 천하를 판가름할 싸움에서 팽월을 제 편으로 끌어들여 형세를 결정지을 수 있었던 기틀은 은근하면서도 애틋한 정이 배인 그 작별 때에 이미 마련되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창읍을 풀어주고 서쪽으로 군사를 몰아가던 패공은 정도(定陶)와 외황(外黃)을 지나 사흘만에 고양(高陽)에 이르게 되었다. 고양은 진류현(陳留縣)에 속한 향(鄕)이다. 패공이 전란 중에 비어버린 향청(鄕廳)을 빌어 며칠 쉬어가려고 하는데, 노관이 기장(騎將;원문은 騎士) 하나를 데리고 패공의 방으로 들어왔다. 풍읍이나 패현 사람은 아니지만 언제나 패공 곁에서 싸워 낯익은 기장이었다.

“저의 고향은 이곳 고양인데, 고향 사람 중에 장군을 꼭 뵙고자 하는 분이 있어 감히 여쭈어보러 왔습니다.”

찾아온 까닭을 패공이 묻자 기장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게 누구인가?”

“이곳 사람들에게는 역생((력,역)生)이라고 불리는데 이름은 이기(食其)로 씁니다. 나이는 이제 예순이 넘었고, 키는 여덟 자로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 서생[광생]’이라고 부르지만 스스로는 미친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패공의 물음에 기장이 다시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러자 패공이 실쭉해진 눈길로 빈정거리듯 말했다.

“그럼 말많은 선비[儒者]인 게로군.”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는 책읽기를 좋아하나 선비는 아닙니다.”

기장이 황급히 그렇게 대답해놓고 다시 변명처럼 말을 이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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