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윗사람의 신임을 얻기 위하여 그의 똥을 먹을 수 있겠는가? 오(吳)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월(越)나라 왕 구천(句踐)은 오왕 부차(夫差)의 신임을 얻기 위하여 병에 걸린 그의 똥을 맛보고 병세를 진단해 줬다. 덕분에 그는 오왕의 신임을 얻어 볼모 상태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온 후 가시나무 침상 위에서 잠을 자고 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다짐했다. 이런 인고의 노력 끝에 그는 마침내 오나라를 꺾고 설욕할 수 있었다. 이것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고사에 담긴 사연이다.
‘열국지’에는 인간의 생존을 위한 인욕과 굴종, 패권을 잡기 위한 계략과 지모 등 온갖 기상천외한 발상과 무궁무진한 책략이 담겨 있다. 원래 ‘열국지’는 춘추시대부터 전국시대 말 진시황의 천하통일까지 550년에 이르는 쟁패(爭覇)의 역사를 알기 쉽게 풀어낸 연의(演義)소설이다. 이 책은 원래 원대(元代)에 여소어(余邵魚)라는 사람이 춘추전국 시대의 고사를 ‘열국지전(列國志傳)’이란 제목으로 편찬했던 것을 명대의 문장가인 풍몽룡(馮夢龍)이 ‘신(新)열국지’란 제목으로 개편한 것이다. 개편 과정에서 그는 ‘좌전’ ‘사기’ 등의 역사서에 근거해서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부분은 삭제하고 누락됐던 사실들을 첨가했다. 이번에 완역된 ‘열국지’는 바로 이 ‘신열국지’를 저본으로 삼은 것이다.
칠순을 바라보는 역자가 한자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독자들을 위해 숱하게 나오는 한자 용어에 친절하게 풀이를 달아준 것도 고마운 일이다. 한학자인 역자는 제목에 ‘이산’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기존에 나와 있는 열국지 번역본의 오역도 적잖이 바로잡았다.
‘열국지’에서는 춘추 오패(五覇), 전국 칠웅(七雄)과 같은 강대국의 흥망성쇠 과정을 다루고 있는데 진영공(晉靈公)이나 제양공(齊襄公)처럼 부패하고 잔혹한 통치자에게는 도의(道義)의 채찍질을 가하는 한편, 제환공(齊桓公)이나 관중(管仲)처럼 개혁적인 정치가에게는 칭송의 노래를 바치고 있다. 아울러 저자는 강대국간에 전개되는 침탈전의 와중에서 신음하며 고통 받는 민중을 동정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풍몽룡은 연의소설이 반드시 역사적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의 책은 문학적 가치보다는 역사적 가치가 더 크다고도 할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는 인류 최대의 격변기였다. 인류가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시대로 옮아가는 단계에서 갑작스럽게 불어난 생산력은 탐욕스러운 인간들 사이에 잔혹한 쟁탈전을 야기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역시 춘추전국시대에 못지않은 격변기라고 할 수 있다.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모를 구하는 사람, 생존하기 위하여 계책을 찾는 사람, 그리고 더 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지략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앞선 시기에 비슷한 길을 걸었던 선인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승환 고려대 교수·철학 kulee@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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