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시대의 영웅 ▼
그가 고교를 졸업할 당시에는 체육 특기생들이 학교수업을 안받는 게 사회문제가 되어 수능에서 일정한 점수 이상을 받아야 특기자로 대학에 갈 수 있었다. 이 선수는 한양대 진학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이 기준을 채우지 못해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다. 그가 예정된 수순대로 대학 팀에서 느슨하게 4년을 보냈더라면 오늘날의 ‘국민타자’ 이승엽은 없었을 것으로 확신한다. 스타가 완성되는 과정은 신비로울 때가 많다.
올 한 해를 되돌아보면 이 선수만큼 국민에게 기쁨을 준 인물도 없다. 경기침체로 신용불량자가 양산되고 청년들이 일자리가 없어 거리를 방황해도 사회는 어떤 해답도 주지 못했다. 각 집단이 저마다 제몫을 주장해 갈등이 증폭되어도 정치인들은 무능 그 자체였다. 하지만 홈런 아시아신기록을 향한 이 선수의 레이스는 국민을 매일 저녁 기쁜 마음으로 TV 앞에 앉게 만들었다.
야구장 외야석은 홈런 공을 잡으려는 ‘뜰채 부대’로 가득 메워졌고 결국 56호 홈런을 펜스 위로 넘기는 날 열광은 절정에 달했다. 어떤 사람들은 대중문화 스타에 몰입하는 군중을 우매하다고 얕보지만 그의 신기록은 답답하고 어두운 현실의 탈출구로서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었다.
이 선수가 올 시즌을 끝으로 해외진출 자격을 얻으면서 그가 어느 팀을 선택하느냐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본인은 미국 프로야구 입단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지만 일본 진출과 국내 잔류의 카드도 고려하고 있다. 문제는 메이저리그에서 그다지 적극적인 영입 의사를 보이지 않는 점이다. 미국 프로야구팀들이 그에게 제시한 계약조건이 신통치 않다는 소식이다. 이 같은 미온적인 반응은 싼값에 이 선수를 얻으려는 협상 전략으로도 볼 수 있지만 이 선수의 상품 가치를 확신하지 못하는 탓이 더욱 크다. 한국에서는 최고라지만 메이저리그에 오면 얼마나 경쟁력이 있을지 반신반의하는 것이다.
한국 선수에 대한 저평가는 이번뿐이 아니다. 이전에도 진필중 임창용 같은 국내 정상급 투수가 미국 진출을 모색하다가 형편없이 낮은 대우에 실망해 국내로 발길을 돌렸다. 국내 프로야구계는 미국 스카우트들이 국내 선수의 실력을 못 알아본다고 분통을 터뜨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하면 이 선수에 대한 메이저리그의 제시조건은 현 시점에서 시장의 가치가 반영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선수의 경우 미국 야구가 한국 야구를 못 믿는 만큼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야구 관계자들은 우리 야구가 선진야구에 뒤질 게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난달 일본 삿포로에서 열린 올림픽 예선을 보면 그 말에 신뢰가 가지 않는다. 정예 멤버를 내보내고도 대만과 일본에 패배해 예선 탈락한 경기 결과도 실망스러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선수단 구성이었다.
대표팀은 미국 프로야구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을 빼놓고 선수단을 구성했다. 해외파들의 실력이 전력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게 이유였으나 국내 프로야구를 외면하고 미국에 진출한 선수들에 대한 섭섭한 감정이 역력했다. 실력에 앞서 ‘내 편’ ‘네 편’을 나누고 국내 인기에 안주하는 프로야구가 밖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우리 사회에 ‘자기 환상’에 빠진 분야가 어찌 프로야구 하나뿐이겠는가 싶기도 하다.
▼메이저리그로 가라 ▼
이 선수의 ‘선택’은 전적으로 본인 의사에 달려 있다. 그는 국내에 남게 되면 미국 프로야구에 진출하는 것보다도 많은 수입이 기다리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국내에 남을 게 아니라 해외로 가야 한다. 최고의 선수들과 직접 대결해 한국 선수의 실력을 과시하는 것이 이미 한국에서 모든 것을 이뤄낸 그에게 적합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가 인정받는 만큼 한국 선수에 대한 저평가는 불식될 것이고 한국 야구는 비로소 ‘우물 안 개구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것이 ‘국민타자’가 택할 명예로운 길이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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