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초원의 영양들도 종종 시속 100km를 주파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치타에게 잡혀 먹히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치타는 비록 오래 달리지는 못해도 순간속도가 110km에 이른다. 오랜 진화의 역사를 거치며 치타는 치타대로 나날이 빨라지는 영양을 따라잡기 위해 점점 더 빨리 달리도록 변화했고 영양은 영양대로 치타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점점 더 빨리 달리게 된 것이다.
자연계에는 이처럼 쫓고 쫓기며 평형에 이른 관계들이 무수히 많다. 진화생물학에서는 이 같은 현상을 이른바 ‘붉은 여왕 가설’로 설명한다.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는 앨리스가 붉은 여왕에게 손목을 잡힌 채 달리는 장면이 나온다. 한참을 숨이 차도록 열심히 달렸건만 결국 제자리걸음을 한 사실을 안 앨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우리가 한 것처럼 이렇게 오랫동안 열심히 달리면 어딘가에 가 있어야 하는데요.” 붉은 여왕이 대답한다. “너희 나라는 느린 나라구나. 여기서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려야 제자리에 머물 수 있단다.”
자연계의 생물들은 어느 누구도 홀로 진화할 수 없다. 모두 다른 생물들과 관계를 맺으며 진화한다. 이름하여 공진화(coevolution)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단 공진화의 쳇바퀴에 올라타면 임의로 내릴 수가 없다. 허구한 날 100km로 달리기가 지겹다고 멈추면 치타의 밥이 될 뿐이다. 달아나는 영양을 따라가기 귀찮다고 주저앉는 치타는 굶어죽는다.
진화생물학자들은 이런 공진화의 쳇바퀴를 때로 ‘진화적 군비경쟁’이라고 부른다. 구소련과 미국이 벌였던 군비경쟁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소련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하면 미국은 그걸 중도에 차단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하고, 그러면 소련이 또 다른 신무기를 개발하고, 또 미국이 그에 대응하는 식의 경쟁이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두 나라의 군비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갔다.
자연의 공진화는 어느 한쪽이 절멸해야만 끝이 난다. 상대가 절멸한 후에도 홀로 쳇바퀴를 돌리고 있는 모습은 측은하기까지 하다. 예전에는 북미 평원에도 가지뿔영양과 어깨를 겨루던 포식동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뒤쫓는 상대가 사라진 오늘에도 가지뿔영양은 그저 온 힘을 다해 달린다. 현명한 판단에 따른 감속은 꿈도 꾸지 않는다. 바라보는 생물학자의 마음만 안타깝다.
요즘 우리 사회 곳곳에도 안타까운 비극의 쳇바퀴들이 돌고 있다. 대통령의 오기에 야당 당수가 단식으로 맞서더니 급기야 1차 때보다 더 큰 표차로 재의결된 측근비리 특별검사법안이 대통령에게 되돌아왔다. 이제 대통령은 또 얼마나 엄청난 반격을 시도할 것인지. 설득과 홍보의 과정을 대충 생략하고 방사성폐기물 처리장 건립을 밀어붙이려던 정부의 계획이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쳐 결국 유혈사태에까지 이르렀다. 함께 손잡고 일해야 할 노사는 먹고 먹히는 관계처럼 늘 으르렁거린다. 사교육과 공교육의 군비경쟁 속에 불쌍한 우리 아이들만 병들고 죽어간다. “엄마 미안해요”라는 편지를 남기고 대입수학능력시험을 치르던 도중에 목숨을 끊은 어느 여학생을 기억한다. 딸의 죽음 뒤에 덜커덕 남겨진 엄마의 모습에서 나는 까닭도 모른 채 헐레벌떡 뛰다 갑자기 멈춘 가지뿔영양을 본다.
자연의 쳇바퀴는 멈출 수 없지만 인간사회의 쳇바퀴는 멈출 수 있다. 끝내 멈출 것 같지 않던 미소의 군비경쟁도 레이건과 고르바초프의 담판으로 사뭇 싱겁게 끝났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치타와 영양은 마주앉아 감속을 논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할 수 있다. 모두 힘을 합해 이 무모한 비극의 쳇바퀴를 멈추게 하자. 우리가 진정 인간이라면 할 수 있어야 한다.
최재천 서울대 교수·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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