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 최초의 과학자/마이클 화이트 지음 안인희 옮김/471쪽 1만8000원 사이언스북스
독일 철학자 칸트는 은하의 기원을 밝히는 성운설(星雲說)을 창시했다. 핼리혜성의 발견자 에드먼드 핼리는 오늘날 사용되는 보험요율표(料率表)의 기초를 마련했다. 한정된 분야에서도 업적을 남기기 힘든 오늘날, 이들의 다양한 관심사를 살펴보면 경이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만큼 다양한 분야를 탐구했던 인물은 인류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을 그린 동시에 헬리콥터와 전차(戰車)의 스케치를 남겼다. 해부를 통해 정밀하게 인체를 관찰했고 빛을 탐구했다.
스티븐 호킹, 찰스 다윈 등 과학자 평전 쓰기에 몰두해 온 저자는 ‘과학자’로서 다빈치의 면모가 예술가 및 공학자로서의 면모 뒤에 가려졌거나 의도적으로 폄하돼왔다고 지적한다. 그는 책의 후반부에서 ‘과학자 다빈치’ 되찾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동시에 이 책은 유년기부터 다빈치의 삶의 궤적을 훑어 내려가며 그의 독특한 생애가 어떤 요소에 의해 창조되었는지 점검하는 종합적 평전이기도 하다.
기록 속에서 저자가 발견한 다빈치는 훌륭한 외모를 가졌고, 섬세한 의상을 사랑했으며, 권위주의나 가식에 휩쓸리지 않는 매력적 인간이었다. 그러나 의심과 비밀주의로 가득 찬 인물이기도 했다. 다빈치는 1만3000쪽이나 되는 방대한 메모와 기록에 알파벳의 왼쪽과 오른쪽을 뒤집어 썼고 자신이 창안한 온갖 암호를 뒤섞었다. 타인에 의해 모방되거나 표절될 것을 염려한 강박증이 그를 괴롭힌 결과였다.
그의 성격과 신념은 때로 모순적이었다.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데 죄책감을 느껴 채식주의자가 됐으며 종종 시장에서 새를 사서 풀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 전반을 ‘무가치하게 배설이나 하는 존재’로 혐오했으며 당대의 ‘대량살상 무기’를 고안해 마키아벨리의 주군이었던 체사레 보르자 등 지배자들의 환심을 샀다.
그러나 책의 제목이 나타내듯 다빈치는 저자에게 무엇보다도 ‘최초의 과학자’였다. 다빈치가 ‘사색과 실험결과가 일치하면 가설을 이론으로 간주하고, 문제해결에 더 맞는 생각이 있으면 다시 실험을 통해 이를 대체하는’ 현대적 과학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다빈치의 과학적 통찰은 때로 실로 놀라운 경지에 이르렀다. ‘물체가 공기에 의해 받는 압력만큼 공기도 물체에 압력을 가한다’는 그의 관찰은 뉴턴의 운동 제3법칙(작용 반작용의 법칙)을 2세기나 앞선 것이었으며, 이는 실제 인간의 비행에 대한 논리적 뒷받침이 됐다. 그는 물결, 소리, 빛이 동일하게 ‘파동’을 통해 전파된다고 봄으로써 훗날 ‘빛의 파동설’을 주장한 호이겐스보다 역시 2세기나 앞섰다.
그러나 저자는 다빈치가 ‘전체론적 세계관’에 묶여 올바른 과학정신을 갖지 못했다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비판도 소개함으로써 논지의 중립성을 지키고자 애쓴다. 그가 대수학에 관한 한 초보자에 불과했다거나, 심장을 정밀하게 관찰했음에도 불구하고 혈액순환의 기능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등의 한계도 짚고 있다.
“독자여, 내게서 기쁨을 얻으려거든 나를 연구하라. 나는 아주 드물게만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니. 이런 작업을 위해 필요한 인내심은 오로지 사물을 새로 구성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니.”
이 메모처럼 다빈치는 자신이 연구되기를 소망했고 재발견되기를 원했지만, 많은 비밀을 감춘 노트들을 재편집하기 전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뉴턴, 라이프니츠, 페르마, 호이겐스 등 후대의 과학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빈치의 업적을 재발견하고 탄성을 발할 때까지, 과학문명은 두 세기를 그냥 흘려보내야 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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