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維石 趙炳玉

  • 입력 2003년 12월 17일 18시 22분


유석 조병옥(維石 趙炳玉·1894∼1960) 선생의 삶을 보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길을 택했던 지식인들이 얼마나 혹독한 고통을 겪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11년간 미국 유학생활을 하고 돌아온 그는 신간회 등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5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가 감옥에서 겪은 고초도 컸지만 석방 이후의 생활은 더욱 참담했다. 그의 회고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참으로 입에 풀칠을 해 가며 살아가기가 난처하였다. 공포와 불안과 헐벗고 굶주림의 암흑생활이 계속되었을 뿐이었다. 나의 내자는 밤잠을 안 자면서까지 재봉틀에 매달려 바느질 품삯을 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석은 이런 말도 남겼다. “나는 기독교신자다. 성경 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그러나 조선 사람의 입장에서 일본을 위해 잘 되라는 기도는 차마 못 올리겠다.” 그런데 열린우리당 김희선 의원은 최근 유석이 ‘독립군을 때려잡던 형사’라고 비난했다. 친일 인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석은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수훈했으며 광복 이후에는 민주화의 상징으로 알려져 왔다. 만약 그런 그가 친일파라면 엄청난 충격이다. 진실을 가리기 위해선 일제 말기의 행적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친일 행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일제에 맞서 끝까지 지조를 지킨 인물이었다.

▷김 의원은 자신의 말이 논란을 빚자 광복 이후 미군정 시절의 행적을 문제 삼았다. 유석은 미군정 때 3년간 경무부장을 맡아 국립경찰의 초석을 놓았는데 그때 ‘친일 형사’들을 요직에 등용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이전에도 제기됐던 것으로 광복 이후의 일을 친일파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 자체에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경무부장 재직 시절 그를 비난하는 투서가 4만8000통에 이르렀다는 게 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증언이었다. 그가 좌익세력을 제거하는 데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당시에도 평가가 엇갈리는 대목에 대해서는 보다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역사를 쓰는 작업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누가 역사를 쓰느냐에 따라 심할 경우 정반대의 결론이 내려질 수도 있다. 증거를 통해 역사를 기술하자는 실증주의 역사학도 역사가들의 근원적 한계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하물며 복잡하게 뒤엉킨 우리 현대사는 항상 정쟁(政爭)이나 비방, 공격의 수단으로 오염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 김 의원이 이번 파문에 유감을 표시했다지만 개운치 않다. 국회의원으로서 올바른 역사관을 갖고 있는지 의문이고 갑자기 왜 유석의 얘기를 꺼내들고 나왔는지도 석연찮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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