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후 중부권의 한 군청 대회의실. 불과 취임 1년반 만에 사퇴하는 것에 대해 잠시 미안함을 내비쳤던 K군수는 자신의 업적을 나열하기에 바빴다.
이날 한 광역시의 O구청장은 ‘○○구의 더 큰 역사 창출을 위해’라는 퇴임사에서 “신뢰받는 지도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 또 다른 봉사의 길로 들어서려 한다”고 말했다. ‘중도 하차’에 대한 일말의 미안함도 없었다. 총선에 출마하려는 지방자치단체장의 사퇴 시한인 이날 전국적으로 13명의 지자체장(광역단체장 1명 포함)이 퇴임식을 가졌다. 대전과 충남지역에서만 지자체장 4명이 금배지를 위해 사표를 던졌다. 대전 유성구는 송석찬, 이병령 구청장이 잇따라 총선 출마차 중도 사퇴하는 기록을 남겼다.
이날 사퇴하는 지자체장들은 하나같이 들떠 있었지만 이를 바라보는 주민들은 착잡했다. 자신들이 뽑아 준 단체장이 4년간 주민과 고락을 같이한다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을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다.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는 성명을 통해 “지방행정을 국회 입성의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행태”라며 “이로 인한 지자체장에 대한 불신은 지방정치에 대한 냉소를 초래할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 단체의 박상우 기획국장은 “사퇴한 지자체장을 선출하지 않았다면 막대한 비용을 들여 보궐선거를 치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선거 비용에 대한 구상권을 청구하는 방안도 검토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지자체장 보궐선거에 따른 총비용은 수백억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선관위에 따르면 자치단체는 선거비용으로 기초단체장의 경우 5억원, 광역단체장의 경우 30억원을 내야 한다. 이들 단체장 선거에 지방의원 등이 출마할 경우 연쇄적인 보궐선거에 드는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다. 여기에 후보들의 선거비용을 합치면 그 액수는 더욱 불어나게 된다.
지자체장들이 “정치에 물들지 않은 행정기관장 출신이니 앞으로 큰일을 하게 해 달라”며 출사표를 낸 이날 기자가 해당 자치단체로부터 입수한 자치단체장들의 1년6개월 전 취임사는 공허하기만 했다.
“앞으로 4년간 문화 복지 환경의 3개 시책에 역점을 두면서 교육 인프라를 확충하고 재래시장 개발 3개년 계획을 완수하며….”(O구청장)
“그동안 추진해 온 군정의 주요 사업들을 조기에 매듭짓고 더욱더 많은 일을 하라는 격려와 채찍으로 알고….”(K군수)
지명훈 사회1부 기자 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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