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경계에 서서 시인은 뒤를 돌아보고, 다시 앞을 내다본다. 경쾌한 목소리를 들려주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시인 황인숙씨(45).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1998) 이후 그가 5년 만에 선보이는 다섯 번째 시집에는 세월이 더해졌다. 시인은 돌아볼 때 신이 난다.
‘그때는 밤이 되면/설레어 가만히/집 안에 있을 수 없었지요… 바람이 어둠 속을 달리면/나는 삶을 파랗게/느낄 수 있었어요/움직였지요/삶이 움직였지요’(‘그때는 설레었지요’ 중)
눈앞에 펼쳐진 시간은 시인을 애잔하게 한다.
‘나는 감정의 서민/웬만한 감정은 내게 사치다/연애는 가장 호사스런 사치/처량함과 외로움, 두려움과 적개심은 싸구려이니/실컷 취할 수 있다//나는 행위의 서민/뛰는 것, 춤추는 것, 쌈박질도 않는다/섹스도 않는다/욕설과 입맞춤도 입 안에서 우물거릴 뿐’ (‘노인’ 중)
‘아이스케키’를 쭉쭉 빨며 땡볕을 걸어오는 꼬마에게 시인의 시선이 박혀 있다. 꼬마의 두 뺨이, 팔과 종아리가 ‘햇볕을 쭉쭉 빨아 먹는다’. 아이의 탱탱한 살갗, 그리고 시인의 한숨. ‘전엔 나도 햇볕을/쭉쭉 빨아먹었지/단내로 터질 듯한 햇볕을//지금은 해가 나를 빨아먹네’ (‘아, 해가 나를’ 중)
‘폭우 소리를 들으면 달리고 싶지’(‘안데르센’ 중), ‘어디로 가버렸는가, 내 꽃다운 스무살은?//나랑 바다에 가서 놀자’(‘네 마흔 살’ 중)처럼 시인은 젊음의 추억을 되새긴다.
지금 이곳에서 시인은, 도시의 일상이 권태롭다. 흙을 뒤덮은 도시의 콘크리트는 자연과의 교감, 삶에 대한 회의와 번민까지 가로막는다.
‘만약 숲 속이라면 독충이나 웅덩이라도 숨어 있지 않을까 조심할 텐데//여기는 내게 자명한 세계/낙엽 더미 아래는 단단한, 보도블록//보도블록과 나 사이에서/자명하고도 자명할 뿐인 금빛 낙엽들//나는 자명함을 퍽! 퍽! 걷어차며 걷는다’ (‘자명한 산책’ 중)
너무 밝고 뻔해서 상상력이 숨쉴 수 없는 공간을 산책하며 시인은 환한 대낮의 비애를 맛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시집 뒷 표지에 “내 시가 최소한 세상에 악취를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내 소극적 바람이다. 적극적 바람은 즐겁게 시를 쓰는 것이다. 매혹적인 시의 길이 영원까지 뻗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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