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병주/서울의 프로크루스테스

  • 입력 2003년 12월 21일 18시 31분


옛날 그리스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 얘기가 나온다. 그는 아티카라는 마을 밖 여행객이 많은 길목에 살았다. 낯선 행인이 지나면 반가이 집안으로 맞아들여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잠자리를 제공했다. 그런데 그 잠자리가 특이했다. 크기가 누구에게나 딱 들어맞는 침대였다. 요새 말로 하면 ‘원 사이즈 피츠 올(one-size-fits-all)’ 침대인 셈이다. 어찌 그럴 수가 있었을까. 그 수법은 간단했다. 사람을 쇠로 만든 침대에 눕히고 침대보다 긴 사람은 다리를 자르고, 짧은 사람은 잡아 늘였다. 그의 이름이 ‘잡아 늘이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이러고는 행인의 짐을 강탈했다. 그의 본색은 잔인무도한 날강도였다.

▷어찌 보면 프로크루스테스는 평준주의자였다. 모든 사람의 키가 들쑥날쑥한 비평준화 세상을 고르게 만들겠다는 꿈을 가진 자였다. 그런 그도 사람의 속마음까지 어쩔 수는 없었을 것이다. 평준화, 그것은 결국 달성 불가능한 꿈이며, 그것의 실현을 위해서는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프랑스혁명(1789)의 기치가 자유 평등 박애였고, 미국 독립선언서(1776)에도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명제가 있다. 이것은 사실적 명제인가, 목표지향적 당위 명제인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전자가 아니라 후자, 즉 우리의 꿈일 뿐이다. 즉 “인간은 평등하다”는 게 아니라 “평등하게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구상 잘사는 나라들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한다. 이 같은 이념을 창달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모두 고만고만한 도토리로 만들어서는 불가능하다. 세상 사람 중에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도 있고, 신체나 정신적으로 큰 사람, 작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들이 조화를 이루며 경쟁하도록 규율과 질서의 틀을 짜야 한다.

▷교육 평준화 이후 서울에 나타난 프로크루스테스의 망령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민주화 이후에 그의 위세가 날로 강해지고 있다. 워낙 이웃사람 탓에 배앓이를 잘하는 우리 국민인지라 망령에 따라 덩달아 춤춘다. 경제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실력으로 앞선 자는 잡고 늘어진다. 그러면서도 괴이한 언행으로 튀는 사람들은 추앙된다. 천박한 세상이다. 세상을 바로잡으려면 헤라클레스의 사촌동생 테세우스가 서울에 왕림해야 한다. 그는 프로크루스테스를 자신의 침대에 묶어 같은 수법으로 보복한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테세우스여, 어서 오시라. 국제경쟁 시대일수록 국내 날강도를 단숨에 물리치는 영웅의 진면목을 보이시라.

김병주 객원 논설위원·서강대 교수 pjkim@ccs.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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