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총선 출마를 위해 사표를 낸 전 비서관들과의 오찬에서 내년 총선은 한나라당 대(對) 대통령-열린우리당의 양자구도가 될 것이라면서 “민주당을 찍는 것은 한나라당을 도와 주는 것으로 인식될 것”이라고 한 것은 대단히 부적절한 발언이다.
청와대는 새내기 정치인들에 대한 격려 차원의 덕담이었다고 해명했지만 중립을 지켜야 할 대통령이 드러내 놓고 불법 사전선거운동을 하는 것처럼 비친다면 그 파장이 또 어디까지 미칠지 걱정이다. 친노(親盧) 단체들의 당선 1주년 축하집회에서 ‘시민혁명론’을 펴고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지지와 분발을 촉구함으로써 사전선거운동 시비를 낳은 게 불과 엿새 전이다. 이쯤 되면 대통령의 심중에는 오직 총선만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듯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되풀이될 수 있겠는가.
중립을 지키면서 선거를 엄정하게 관리해야 할 대통령이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행태를 보인다면 선거가 시작되기도 전에 선거판의 법과 질서는 무너져 버린다. 대통령이 불법 선거운동을 한다는데 누가 나서서 불법을 막고 공정하고 깨끗한 선거를 얘기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노 대통령은 무당적(無黨籍)이다. 열린우리당에 곧 입당한다지만 아직은 어느 당에도 속해 있지 않다. 지역할거주의를 타파하고 미국식 국정운영을 하기 위해 무당적을 택했다는 대통령이 노골적으로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를 유도하는 발언을 한다면 결국 국민을 기만하는 셈이다.
노 대통령은 취임 후 줄곧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이번에 바꾸지 않으면 정치는 물론 나라의 미래가 없다고 했다. 그런 대통령이 불법 사전선거운동으로 오해받기에 충분한 발언을 계속한다면 자기모순이다. 야당은 노 대통령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할지를 검토한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실정법 위반 여부가 아니다. 두려운 것은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완전히 깨져 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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