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올드 보이’는 중대한 죄를 고백하면서도 낱낱이 자백하지 않고 장물을 여기저기 숨겨 놓은 음흉한 고백이다. 이 글은 그 고백을 구성하는 속임수를 가려내어 진실을 밝히고 고백자의 정체성을 탐색하는 작업이다.
2. “넌 누구냐?” 그 대답을 찾아서
맨 처음에 “넌 누구냐?”라는 질문이 나왔을 때, 그 질문은 이미 형성되어진 과거에 대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관객은 오대수와 함께 과거를 헤매게 된다. 그러나 대답은 현재에서 미래에 이르는 시간에 준비되어 있다. 그 속임수를 깨닫는 순간 관객은 반전을 체험한다. ‘너는 누구냐?’고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표면적으로는 ‘과거의 나’를 묻는다는 의미와 그 이면에는 ‘현재부터의 나’를 묻는다는 의미가 처음부터 들어 있다. 전자는 속임수이고 후자는 진의(眞意)이다. 그 진의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조금씩 드러나는 것이기에 미시적 단위의 축적을 통해 의미를 파악하는 관객은 계속적인 반전을 체험할 수밖에 없다. ‘올드 보이’는 이러한 반전의 반복으로 진행된다.
3. 이 영화는 복수극이다?
진정 전통적인 복수극이라면 마지막에 이우진이 오대수의 손에 죽임을 당하거나, 오대수가 이우진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한다. 그러나 복수의 마지막 문턱에서 오대수는 무릎을 꿇고 자신의 혀를 자르고, 누이를 잃은 동생은 그런 오대수를 죽이는 게 아니라 자기를 죽인다. 거울을 마주보고 서 있는 형상과 같이 이우진과 오대수를 대비시킴으로써 단순한 복수극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우진이 오대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두 사람이 실체와 그림자의 관계처럼 동일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음을 드러낸다. 이우진으로서는 오대수를 죽이지 않고 남겨두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복수인 동시에 자신의 분신을 세상에 남기는 의미 있는 행위가 된다.
4. 이 영화는 근친상간 문제에 대한 것이다?
마지막에 우진이 미도에게 비밀을 알리지 않는 것에 이 영화가 단순한 근친상간의 영화가 될 수 없는 실마리가 있다. 이우진은 오대수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만큼 미도와 수아를 동일시한다. 수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미도에게 비밀을 알리지 않는 것으로서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 악역 이우진에 대한 관객의 공감이 유발된다. 이로써 이 영화는 매우 에둘러서 제도나 관습, 그것이 무엇이든 결국 진실한 마음, 진정한 사랑이 중요한 것이 아니냐는 메시지를 던진다.
5. 대답이 아니라 질문을 찾아라!
미장센을 포함해 ‘올드 보이’가 보여주는 의장(意匠)의 특징은 대비(對比)이다. 이 영화는 대비와 전도, 그로 인한 반전이 반복되면서 일정한 패턴을 이룬다. 결국, ‘그렇다, 아니다’의 단순한 대비가 반복됨으로써 오대수와 이우진의 쌍생아적인 자기동일성을 향해 수렴되어 가는 것이다.
6. 에필로그
표면적으로 현란해 보이는 구성, 구도, 장치, 심지어 화려한 소품에까지 현혹되다 보면 ‘올드 보이’는 매우 기교적인 영화만이 된다. 그러나 속임수가 많으면서도 이 영화의 저변은 단순하다. 단순하기에 속임수가 많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박찬욱의 난해하고 치밀한 고백 밑에는 ‘이것이 왜 안 됩니까?’와 ‘적어도 이것만은 지켜져야 되지 않겠습니까?’라는 두 가지 질문이 들어 있다. 여기에서 ‘이것’은 바로 ‘경계 없는 사랑’과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알고 보면 다소 허망하게도 질문 안에 이미 그 답이 들어 있는 것이다.
▼당선소감-박유희▼
문학 연구자로 활동하면서 신춘문예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망설여지는 일이었지만, 영화는 나에게 새로운 탐색의 대상이기에 그 출발선을 다시 그어보고 싶었다.
그동안 문학 공부를 하면서 언어와 소통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 왔다. 이러한 관심은 점차 서사의 수사학에 대한 것으로 확장되면서 다양한 매체의 표현이 나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특히 현대의 대표적 서사 매체인 소설과 영상 텍스트를 연계하여 탐구하는 것은 나의 학문적 궤적으로 볼 때나, 현재의 문화적 상황에서 볼 때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제, 이 일을 계기로 문화 현장과 보다 직접적으로 소통하고 싶다. 그리고 그 소통을 통해 나의 문제의식을 구체화시켜 나가겠다고 다짐한다.
고마운 분들을 떠올리니 내 삶이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 새삼 느껴진다. 그 누구보다도 친정 엄마께 감사드리고 싶다. 나의 인문학 활동은 그 분의 노동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어머니의 노동에 조금이라도 누가 되지 않기 위해 항상 성심을 다하려 한다. 그리고 지도교수이신 송하춘 선생님을 비롯한 고려대학교 은사님들, 둘도 없는 가족, 선배와 친구들께 감사드린다. 그 분들의 배려와 관심은 언제나 내게 큰 힘이었다. 그 빚은 살면서 갚겠다. 인문학자로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그 길임을 안다.
어려서부터 영화는 나에게 큰 즐거움이자 잡히지 않는 꿈과 같았다. 이제 영화를 실컷 볼 수 있는 빌미를 찾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다시 한번 참 기쁘다.
▼심사평-진정성 돋보인 생생한 평론▼
영화평론 부문도 영화흥행 시장 못지않게 시류와 유행에 민감하다. 금년에도 변함없이 응모자들은 당해연도의 작품들 중 가장 화제가 된 최신 영화를 주로 비평의 대상으로 삼았다. 흑백 고전영화들은 물론이고 1970년대와 80년대 그리고 심지어 90년대의 작품들도 빠르게 잊혀지고 있다. 한국영화는 극장에서 상영이 끝나면 리바이벌되지 않는 일회용 상품이다. 금년 응모작 29편 중 거의 8할이 최신 흥행작 몇 편에 쏠려 있었다. 한국 영화평론의 시야와 관심은 더 넓고 깊어져야 한다.
커다란 신문사 봉투에 담겨져 택배로 전달된 응모작들을 일별한 다음 봉투를 닫고 이틀을 보냈다. 빨리 읽고 싶다는 가슴 두근거림보다는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다는 무의식의 방어기제가 기승을 부렸다. 영화는 쉽고 재미있는데 평론은 왜 어렵고 지루할까? 물론 영화평론은 감각적인 이미지 안에 숨어 있는 의미의 망을 밝히는 이성적인 작업이다. 그러나 요즘 영화평론들에서는 영화라는 생명체는 사라지고 생경하고 난해한 관념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경우가 많다. 평론가가 세상과 영화의 진짜 문제를 끄집어내 목숨을 걸고 승부하면 영화평론도 영화 못지않게 재미있을 것이다.
당선작으로 ‘올드 보이’를 평한 박유희의 ‘속임수 사이로 자기 정체성을 향해’를 골랐다. 응모작들 중 가장 안정된 논리와 글쓰기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 이론가들의 개념에 빠지지 않고서도 지적이면서 진정성이 보이는 살아있는 평론이었다. 차연우의 ‘미친 희망의 노래’와 허병민의 ‘동상이몽의 논리 안에서 꿈으로의 탈주’를 반복해서 읽었다. 전자는 화려하면서도 개성적인 문체가 빛났다. 하지만 정작 분석의 대상이 되는 영화는 잘 안보였다. 후자는 아주 집요한 논리가 돋보였다. 하지만 당선작만큼 흥미롭지는 않았다.
강한섭 영화평론가·서울예대 교수
댓글 0